정보통신(IT) 반도체 등 국내 핵심기술을 빼돌리는 기업형 산업스파이가 날뛰고 있다.과거 개인차원의 절도수준에 머물던 산업스파이가 최근 들어서는 아예 별도 회사까지 설립해 기술을 빼내는 등 기업형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15일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이승섭 부장검사)에 의해 구속된 하이닉스 전 생산기술센터부장 김모씨(46) 등의 기술유출사건은 대표적 사례이다. 검찰은 이날 반도체 제조공정 기술을 유출한 혐의(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김씨 등 5명을 구속하고 윤모 하이닉스 전 과장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번 사건은 김씨 등 일당이 빼낸 기술을 활용하기 위해 투자자로부터 2억달러를 유치한 뒤 중국에 회사까지 세우려 한 대규모 '기업형' 첨단기술 유출 사건의 첫 사례로 꼽힌다. 이들이 통째로 빼내려 했던 기술은 낸드(NAND)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에 관한 것으로 하이닉스가 2년간 연구비 6245억원을 투입해 개발,작년 영업이익(약 2조원)의 60~70%를 차지한 주력 제품이다. 이들의 수법은 치밀하고 대담했다. 김씨는 작년 2월 중국 내 반도체 생산을 목적으로 조세 면제국가인 케이맨 군도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뒤 같은 해 5~6월 우모씨(구속) 등 하이닉스 핵심 엔지니어 6명으로 중국 반도체 공장 건설 준비팀을 구성,이들에게 퇴사 때 낸드 플래시 기술 자료 일체를 반출토록 지시했다. 우씨 등은 연봉 7000만~1억원에다 스톡옵션을 받는 조건으로 김씨의 요구에 응했다. 김씨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총 12억달러의 투자유치를 추진 중이었으며 중국 내에서 판매까지 협의하는 등 일사천리로 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지난달 국가정보원의 제보로 이들의 허황된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컨설팅을 가장한 기술유출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검찰은 지난해 외국계 회사의 한국지사 P사가 컨설팅을 해주겠다며 국내 전자,기계회사에 접근한 뒤 획득한 기술자료를 자사 인터넷 영업망에 올려놓았던 사건을 적발했다. 올초 적발된 A사의 6세대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컬러필터 공정기술의 대만 유출미수 사건은 단순 절도에 익숙해 있던 당국을 긴장케 한 첫 사례다. 당시 대기업 연구원이던 류모씨 등은 전직을 결심한 직후 회사 컴퓨터망에 접속해 6세대 TFT-LCD제조기술 자료를 개인용 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 담아 빼내는 대담함을 보였다. 한 반도체회사 직원은 경쟁회사로 전직을 약속받은 뒤 회사 내에서 유명 포털사이트 내 자신의 홈페이지 계정에 접속, 회사 기밀을 전송하는 수법으로 5차례에 걸쳐 330여개의 프로그램을 빼돌리다가 덜미를 잡혔다. 의료기기 제조업체 M사 연구원들은 고액 연봉을 받기로 약속하고 경쟁업체에 초음파진단기 핵심기술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이처럼 첨단기술 유출 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산업스파이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미비한 법 규정 때문이다. 지난 4월에는 6세대 LCD 관련 핵심 기술을 빼돌리다 작년 11월 구속된 차모씨가 보석으로 석방되는 일이 있었다. 1심 재판의 경우 구속시한이 6개월을 넘지 못한다는 획일적인 법규로 인해 피해액만 5000억원이 넘는 기술을 빼돌린 산업스파이가 5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이 규정 때문에 CDMA 휴대전화 기술을 가지고 국내 경쟁회사로 이직한 구모씨도 같은 달 구속된 지 두 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또한 피해액이 천문학적 규모인 기술유출 사건의 현실을 모르고 사실상 피해액의 2∼10배를 벌금으로 매긴다는 비현실적인 법 규정도 벌금형과 징역형을 동시에 내릴 수 없게 해 솜방망이 처벌을 부추기고 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