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스파이 비상] (중) '정보 블랙박스'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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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스파이 사건의 60%가 전직 직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국내기업의 기밀 관리가 얼마나 허술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 퇴사 직전에 기밀을 빼돌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현직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당수의 기업들이 핵심기밀이 담겨있는 파일이나 컴퓨터 등 정보저장장치를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누군가 파일을 열어봐도 흔적이 남지않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정보가 유출된 사실 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지난해 1월 적발된 국내 굴지의 메모리반도체 회사의 기술 유출사건이 대표적이다.
책임연구원인 B씨는 근무 조건이 좋은 미국 기업으로 옮기기 위해 사표를 냈다.
회사는 그를 붙들기 위해 연봉을 올려주고 미국지사 근무를 약속했다.
하지만 B씨는 끝내 고집을 부려 퇴사절차를 마쳤다.
이미 거역할 수 없는 음험한 거래의 손길에 마음을 빼앗긴 뒤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향후 전직에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사이버폴더를 이용해 반도체 기술자료를 무단 반출했다.
용량은 무려 20기가바이트로 A4용지 20만장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회사가 추산한 자료의 가치는 대략 6조원 수준.지금까지 국정원이 적발한 기밀유출 사건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측은 B씨의 행동이 미심쩍다고 의심해 당국에 제보만 했을 뿐 정작 기밀이 유출된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기업 치고는 보안시스템이 너무 허술했다"며 "B씨가 조금만 노련하게 처신했더라면 아마 '뜻'을 이뤘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도 샤프 캐논 히타치 등의 일본 기업들처럼 기밀관리 기법을 '블랙박스(Black Box)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는 첨단기술의 열람 범위를 극소수 임원으로 제한하고 자료 열람 시기와 장소,열람자 등의 정보를 컴퓨터에 기록토록 하는 시스템이다.
히타치의 경우 PC를 통한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사내 업무용 단말기 30만대를 모두 네트워크 단말기로 교체키로 결정했다.
네트워크 PC시스템에서는 개인적인 정보 저장과 입출력이 불가능하고 모든 소프트웨어는 본사의 중앙서버를 연결해야만 접근할 수 있다.
또 별도의 인증장치를 부여받은 직원들만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고 해당 기록도 남게 된다.
이에 따라 회사 측은 중앙서버와 네트워크만 관리하면 보안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DRM(Digital Rights Management:디지털 인증기법)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이다.
인증을 받은 자 외에는 자료 접근 복사 다운로드 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철저한 보안시스템도 내부자 한 사람이 기밀을 유출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뚫리곤 한다.
핵심기술을 보호하는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기술을 취급하는 인력관리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비록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보를 복사하거나 다운로드는 할 수 없도록 추가적인 조치를 취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지난 2003년 7월 발생한 미생물 발효장치 제조기술 유출 사건 역시 내부 핵심인력에 의해 자행된 경우다.
미생물 발효장비 생산업체인 P사의 연구직원 H씨는 세포배양기 자동공정시스템 등의 설계도면을 CD에 담아 퇴사한 뒤 동종회사인 S사를 설립했다.
한동안 재미를 본 H씨는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업체와 합작까지 시도하다가 당국에 적발됐다.
문제는 미생물발효장비가 화학무기를 생산하는데도 사용되는 장비이기 때문에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야 외국에 수출할 수 있다는 점.모의 기간이 2년에 달했고 내부 공모자가 4명에 달했던 점도 놀라웠다.
기밀을 유출시킨 직원들의 주도면밀함에 비해 회사의 대응시스템은 무인지경 그 자체였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성남지청 관계자는 "경우에 따라 외교문제까지 야기시킬 수도 있는 중요한 기술을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고 빼돌릴 수 있었다는데 아연실색했다"며 "척박한 생명공학분야에서 어렵게 개발한 기술을 너무도 허망하게 중국에 넘겨줄 뻔 했다"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