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3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의 29주년 광복절 행사장에서 발생한 문세광(文世光)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저격 사건은 예기치 못한 사건의 폭발성만큼이나 정치권에 대한 후폭풍도 컸다. 사건 8일 후인 22일 '피스톨 박'으로 상징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박종규(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은 충성 경쟁을 벌이던 차지철(車智澈) 국회 내무위원장에게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15년 남짓 누려온 '대통령 오른팔' 지위도 함께 내줬다. 8.15 사태로 공화당 정권의 권력이동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박 실장은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를 맡은 이래 63년 경호실 창설시 차장 취임에 이어 실장으로 승진하면서 2인자 역할을 해왔다. 8.15 사건으로 '피스톨 박' 인맥이 '땅을 친' 반면, 차지철 사람들은 하나 둘권력실세 자리에 오르는 등 8.15의 여진은 공화당 권력지형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 5.16 거사 후 숱한 외유 등 부침끝에 철옹성을 구축했던 김종필 총리는 물론신직수(申稷秀) 중앙정보부장, 김정렴(金正濂) 비서실장 등에게도 타격이 컸다. 또,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던 김용태(金龍泰) 원내총무 등 공화당 지도부와 백두진(白斗鎭) 의장, 민병권(閔丙權) 원내총무 등 유정회 간부들도 일괄사표를 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인책 범위를 치안 총수인 홍성철(洪性澈) 내무장관과 박종규실장 등 두 명으로 매듭 짓고 사표를 대거 반려했지만 사건 당시 휴가중이었던 김총리는 여론의 질타에 시달렸고, 김 총무 등 당정 지도부의 위상도 실추됐다. 당일 경축식전을 맡았던 양택식(梁鐸植) 서울시장 역시 8.15 사건의 불똥으로사퇴한 케이스. 양 시장은 사건 당시 단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보도 이후 여론의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다가 열흘만에 사표를 냈다. 그는 김용태 총무가 "사임해야 마땅하다"고 질타한 지 일주일만인 9월 3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duckhw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