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부족한 게 많은 나라다. 원유나 가스 같은 천연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말레이시아로부터 물까지 수입하고 있다. 그런데도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에너지 허브'로 불린다. 지난 70년대부터 끊임없이 에너지 관련 시장 유치에 노력해온 결과다. "왜 하필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싱가포르인가"라는 물음에 싱가포르에 진출한 석유회사 관계자들은 "시장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하는가"라고 이구동성으로 답한다. 현재 싱가포르에 집결해 있는 크고 작은 석유회사들은 줄잡아 2백여개.물량 확보와 제품 거래에 연일 전쟁을 벌이고 있다. 현물 선물 파생상품 등 트레이더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상품 종류만도 1백가지가 넘는다. 도심 처치가(街)에 위치한 세계적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지사.20여명의 트레이더들이 저마다 2∼3대의 모니터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석유제품 가격 정보를 파악하느라 분주하다. 전화기 2대로 번갈아 통화하며 거래를 성사시키려 애쓰는 모습도 눈에 띈다. 모건스탠리의 싱가포르 지사가 운용하는 펀드는 50억달러 규모.지난해부터 고유가 체제가 지속되면서 이 곳을 드나드는 돈의 흐름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 비중이 축소되고 석유 관련 제품에 대한 단기 투자 비중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는 것. "2002년만 해도 에너지 투자 비중은 전무하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지난해에는 비중이 10% 이상으로 갑자기 확대됐습니다. 당분간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달러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만큼 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 비중은 더 늘어날 것으로 봅니다."(알란 코 에너지담당 이사) 모건스탠리와 같은 투자은행들이 싱가포르 에너지 거래시장의 신규 참여자라면 엑슨모빌 쉐브론텍사코 쉘 BP 등 세계적인 석유메이저들은 '터줏대감'들이다. 여기에 수백개의 석유전문 트레이딩 회사,일본의 종합상사들도 줄줄이 진출해 시장의 한 부분을 맡고 있다. 국내 회사로는 SK㈜ LG칼텍스정유 현대오일뱅크 등이 지사를 두고 있다. 민정기 SK㈜ 싱가포르지사 부장은 "효율적이고 청렴한 정부가 외국 기업의 활동을 최대한 배려해 주는 데다 수십년간 석유 관련 시장을 정책적으로 키워온 결과 싱가포르는 아시아 지역 석유 관련 기업들의 소리없는 전쟁터가 됐다"고 설명했다. 무자원국 싱가포르가 거대한 석유메이저들을 끌어들여 명실상부한 아시아 석유 거래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해상교통의 요지라는 천혜의 조건도 배경이 됐지만 정부의 파격적인 세제 지원이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외국기업을 대상으로 AOT(Approved Oil Trader)라는 자격제도를 마련,승인된 회사에 대해 20%인 법인세율을 10%로 낮춰줬다. 안소티 탄 쉐브론텍사코 트레이더는 "인프라와 금융이 발달한 비즈니스 환경에 법인세마저 크게 깎아주니 어떤 외국기업이 이곳을 마다하겠느냐"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원유와 석유제품 거래시장 이외에도 석유 탐사와 관련된 물류 서비스 시장도 함께 조성했다. 북동쪽 로양지역에 54㏊ 규모로 펼쳐져 있는 로양공급기지가 바로 그 곳.로양기지엔 50여개의 물류 창고가 자리잡고 있으며 항만엔 시추선 바지선(해상창고선) 보급선 등이 정박해 있다. 이동식 대형 크레인과 트레일러 트랙터 등 중장비들도 눈에 띈다. 지하를 뚫는 시추 파이프들이 야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로양기지 관계자는 "지리적인 장점 때문에 80년대부터 탐사와 시추장비 회사들이 몰려 들어 지금은 2백여개가 밀집해 있다"면서 "아시아지역 해양과 육상에서 탐사 개발 생산 활동을 벌이는 석유회사들은 이 곳에서 원스톱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각국에서 탐사와 시추를 벌이며 대박의 꿈을 키우는 석유회사들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알란 코 모건스탠리 이사는 "싱가포르는 관련 시장을 선점해 무자원국의 설움을 극복한 케이스"라면서 "각종 원유와 석유제품 거래 시장과 물류 시장을 통해 벌어 들이는 돈은 자원 개발로 벌어들이는 이익보다 큰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