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맨들에게는 힘들다 못해 욕이라도 한바탕 쏟아낼 만한 한 해였다. 유난히 악재가 많이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주가는 출렁거렸다.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나 차이나쇼크,원·달러 환율 폭락,국제유가 급등,신행정수도 위헌 결정 등….악재가 터질 때마다 주가는 바람 앞 촛불처럼 출렁거렸다. 명퇴 바람은 연중 내내 증권맨들을 옥죄었다. 증권업계에 몸담은 지 불과 8∼9년차인 30대 중반 세대에까지 냉기가 전해왔다. 40대 초반의 소위 386선배들과 신세대 후배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혼돈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낀세대'라 부른다. 40대 후반 또는 그 연배 이상의 선배들이 들으면 젊은 애들이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줄 만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도저도 아닌 '그저그런 세대'라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 그만큼 올 한 해는 고민도 많았다. 지난 16일 밤 서울 여의도 한 맥주집에서 자칭 낀세대 5명이 자리를 같이했다. 애널리스트,매니저,지점 브로커,상품 개발자,이코노미스트 등 하는 일은 다르지만 '??증시'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낀세대들은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지 못했지만 내성이 강해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얘기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최대근 키움닷컴증권 자산운용팀 과장이 "증권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불쇼'(지수가 거침없이 솟구쳐 오르는 대세상승장)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희망을 지폈다. 과거 증권업계의 호황기를 한두 번 맛본 이들은 지난 99년과 같은 IT 활황기가 한 번쯤은 다시 올 것이라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고유선 동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지금과 같은 초저금리가 계속되는 한 결국 돈은 주식시장으로 올 수밖에 없다. 배당수익률만 따져도 이미 시중금리 이상 되는 종목이 부지기수다"고 했다. 간접투자 찬양론도 쏟아졌다. '증권은 곧 투기판'이란 인식을 없애는 데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의식도 흘러 나왔다. 하지만 화제가 정치로 옮겨가자 갑자기 냉기가 돌았다. 최대근 과장은 "정치 리스크가 없었다면 지수는 이미 2,000포인트를 넘었을 것"이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김종철 굿모닝신한증권 상품개발팀 대리도 "정치로부터 경제 좀 독립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말했다. "정치는 4년짜리 계약직에 지나지 않는데 비정규직(정치)이 정규직(경제)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직격탄도 나왔다. "386세대 정치인들은 경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정부 고위관료들은 증권시장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재산내역 공개때 보면 왜 그리 주식은 많이 들고 있는지…,웃긴다." 한마디로 증권시장에 관해 ?도 모르는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관료들이 '감놓아라 배놓아라'하는 게 역겹다는 것이다. 취기가 오르자 화제는 업계의 현실로 돌아왔다. 이재승 삼성증권 사당지점 대리는 "지수는 800선인데 지점 분위기를 보면 500선에도 못 미치고 있다. 주식시장을 떠받치는 자금의 질이 변하지 않는 한 업계가 달라지는 걸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한숨지었다. 주식시장의 개인고객이 땅부자나 사채업자인 현실을 개탄했다. 서정광 L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구조조정 실패에 화살을 날렸다. 구조조정 운운하다 이듬해 시장이 반짝 좋아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99년만 하더라도 6천억원이면 모든 증권사가 먹고도 남았는데 지금은 파이가 1조6천억원으로 커졌어도 다들 죽는다고 아우성이다"라고 했다. 고유선 동원증권 이코노미스트가 "모두들 증권사간 인수합병(M&A)을 얘기하면서도 원론에 그친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제 증권사가 매물로 나와도 사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차라리 극한상태로 가는 게 해결책이 아니겠느냐"는 자포자기성 발언도 튀어나왔다. "수조원이 있다면 경쟁력 없는 증권사를 모두 사버리고 싶다"는 한탄도 이어졌다. "증권사끼리 합쳐봐야 시너지가 나올 게 없다. 금융업종간 영역이 허물어져 은행 보험사는 속속 공격해 들어오는데,커다란 변화의 흐름에는 둔감한 채 자기 영역에만 안주한다면 외국계한테 당할 수밖에 없지." 갑자기 증권사간 수수료 인하 경쟁을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한 친구는 "증권업계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수수료 인하 경쟁 때문"이라며 수수료 인하경쟁을 촉발시킨 모 증권사를 증권업계 5적의 하나로 꼽았다. 이에 서정광 애널리스트는 "모 증권사가 수수료 인하경쟁을 안 했어도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나왔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어차피 과당경쟁 체제 아래서 수수료 인하경쟁은 정해진 수순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렇다면 생존 대안은….또다시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서정광 애널리스트가 일순간의 침묵을 깨며 내부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우리 증권업계가 모두 비슷한 무기를 갖고 싸우는 게 문제다. 중소형 증권사까지 투자리포트를 만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최대근 과장은 자산관리 분야를 공격했다. "중대형 증권사들이 너도さ?자산관리에 나서고 있다"며 "그러나 밑에서 준비는 전혀 안 됐는데 위에서만 쪼는 형국"이라고 했다. 경영진들은 영업직원 한 사람이 주식도 팔고,펀드도 팔고,자산도 운용하고 모든 걸 다 하는 게 자산관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고유선 이코노미스트도 "대형 증권사들을 보면 너도나도 선진국형 투자은행으로 가자고 하는데,과연 우리 현실에서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미국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 같은 대형 투자은행들은 세계 자본이 모이는 월가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IB(기업금융)가 뭔지 제대로 아는 증권사는 몇 안 될거야." 모두의 자위성 결론이었다. 해법은 없는데 이미 혀가 말을 듣지 않는다. 자연히 '내탓이오'조가 흘러 나왔다. 서정광 애널리스트는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신세계가 그예로 제시됐다. "신세계 주가가 애널리스트들의 '매수' 의견속에 한창 잘 나가 30만원을 넘자 고점에서 이익실현한 매니저들이 '신세계 목표가 좀 다시 낮춰봐'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애널리스트가 목표가를 낮춰 주가가 20만원대로 하락하면 다시 사겠다는 속셈이지.' 모두가 동감했다. "브로커도 마찬가지야." 김종철 대리도 자아비판에 동참했다. 브로커는 진짜 브로커리지 기능만 해야 되는데 그동안 우리 풍토에서는 일임매매 등을 밥먹다시피 해왔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개인이 증시를 떠난 게 우리탓 같다는 표정이다. "개인도 바뀌어야 돼." 증권사가 추천하면 앞뒤 안보고 사거나 어떤 재료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몰빵'을 지르는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식 발언도 던져졌다. 하지만 낀세대 5인의 망년회는 오히려 가슴만 답답하게 만든다. 폭탄주가 당길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한 차를 더 돌아야 분이 풀릴 것 같다. 맥주집을 나오며 모두가 주위를 살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인 듯하다. 정리=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 사진=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