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大家)는 다르다. 세상의 큰 흐름을 읽고 그 변곡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가는 '큰(大)'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것(detail)에 훨씬 민감하다. 15년이 채 못돼 전세계 수많은 기업과 조직에서 경영혁신도구로 뿌리를 내린 BSC(균형성과표:Balanced Scorecard)의 창시자인 로버트 캐플란 하버드대 교수는 대가의 이런 풍모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다. 한국경제신문사 후원으로 지난 19일 서울 코엑스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초청 강연회에서 그는 '세계' '경제' '비전' 등 큰 얘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다. 대신 한 회사나 조직이 어떻게 하면 갖고 있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전략적인 목표를 제대로 실행해 최대의 성과를 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하루 종일 계속된 '단독 강연'을 이끌어갔다. 강연회 직후 캐플란 교수를 만났다. [ 대담=권영설 한경가치혁신연구소장 ] -강연 시간만 6시간이 넘었는데 피곤하지 않나. "원래 6시간 프로그램이라 괜찮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강연하는 데다 감기가 심하게 걸려 걱정이 많았다. 질문이 많아서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이 지날 정도로 반응이 좋아서 기쁘다." -지난 92년 당시 BSC를 창시한 동기는 무엇인가. "이전의 경영혁신 도구들이 지닌 한계를 고쳐보기 위해서였다. 사실 70년대까지만 해도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 개념이 통했다. 구성원들이 자기 직무만 잘 알고 열심히 일하면 개인의 실력에 상관없이 효율적 조직을 갖출 수 있었다. 모든 종업원이 회사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역량을 거기에 맞출 수 있는 '전략집중형 조직(SFO:Strategy-Focused Organization)'이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BSC다." -당시에도 종업원들의 성과를 높이고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 않았나. "주로 재무시스템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재무적인 관점만으로는 고객과의 관계,연구개발(R&D),직원들의 교육 및 동기 부여 등 무형 자산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재무시스템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BSC가 제시되자 공공부문과 비영리조직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도 2002년 이후 BSC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이미 50여개 기업과 기관이 도입했거나 검토 중이다.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어떤 전략을 택하느냐도 중요하지만,한 번 전략을 세웠으면 전사적으로 그 실행을 위해 자원을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물적·인적자원은 물론 모든 무형자산까지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개인의 역할까지 조목조목 알려주는 BSC는 아주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혁신'을 아젠다로 내세우면서 공공부문에서 혁신 실행을 위한 평가 및 측정 도구로서 BSC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태다. "올바른 방향이다. 공공부문의 경우는 국민의 세금이 활동 원천이기 때문에 실제 결과 뿐 아니라 그 예산을 쓰는 과정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BSC 같이 객관적으로 그 실행과정을 검증할 수 있는 도구가 그래서 필요하다. BSC를 통해 공공부문은 예산 집행 과정 등에서 신뢰도(accountability)를 크게 높일 수 있다." -한국의 기업들은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럴 때 새로운 경영혁신 도구를 도입하는 것은 오히려 짐이 되지 않겠나. "기업 경영이든 비영리 기관 경영이든 경영이란 기본적으로 측정할 잣대가 있어야 한다. 측정이 안되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가 안되면 발전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외부적 변화를 제대로 읽고 그 변화에서 앞서가기 위한 전략적 목표를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전략담당부서(OSM:office of strategic management)를 둬 전략을 찾고 전사적으로 그 전략을 실행하는 방법론을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 경제상황이 어렵다고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과제다." -기업 발전 전략을 찾아내는 방법은 BSC의 영역이 아닌 것으로 들린다. "BSC는 전략 이후를 다루는 경영도구다. 회사나 조직 차원에서 전략을 세우고 나서 그것을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론이 바로 BSC다. BSC를 통해 실행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전략의 한계를 찾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전략은 결국 개별 기업이나 전략컨설팅업체의 영역이다." -BSC에 잘 들어맞는 전략론은 없는지. "그런 것은 특별히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하버드대 동료인 마이클 포터의 전략론을 좋아한다. 프라할라드 미시간대 교수의 '핵심역량'론에도 관심이 있다.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가 창안한 '가치혁신(Value Innovation)'도 아주 유용한 사고를 담고 있는 전략론이다. 창시자 두 사람 가운데 김 교수는 못만났지만 마보안 교수와는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BSC가 가치혁신론을 채택한 기업이 전사적으로 기업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기업이나 조직에 통하는 경영혁신도구라면 개인에게도 유용할 것 같다. '1인 기업'에 주고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BSC가 주는 메시지는 균형잡힌 인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웃음).단기적으로 지금 하는 일에서 성과를 올리는 방법과 장기적으로 비즈니스와 인생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저녁 일정을 묻자 하버드비즈니스스쿨 MBA과정에서 자신에게 배운 제자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만날 사람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 이재용 상무였다. 캐플란 교수는 "그 친구가 오늘 강연회에 꼭 오고 싶었는데 외부 일정 때문에 못와 저녁을 먹자고 했다"고 말했다. 현재 삼성생명만 도입하고 있는 BSC가 삼성그룹 전체로 퍼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