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院산책] (14) 백흥암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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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늦었어요? 내내 기다리다가 이제 외출하려고 하는데..(난 나갈테니)점심 공양이나 하고 가슈!"
약속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데 대한 백흥암 선원 주지 육문(六文.58)스님의 꾸지람이다.
< 사진설명 : 가을 햇살을 받으며 백흥암 앞 무밭에 선 주지 육문 스님과 선원장 영운 스님. 김장 담그기에 대해 얘기하는 표정이 여유롭다. >
외출한다는 얘기도 농이 아닌 모양이다.
목도리를 두른 채 밀집모자까지 썼다.
낭패감이 뇌리를 스치는데 스님이 다시 한마디 툭 던진다.
"근데 뭘 취재할 꺼유?"
스님은 외출하려던 발길을 돌려 객을 방으로 안내하고 점심상을 내온다.
나이 어린 비구니 스님이 내온 점심 메뉴는 단촐하다.
쌀과 보리,율무를 섞어 지은 밥과 배추김치,갓김치,감자채볶음,재피잎절임,상추.절집에서 먹는 상추쌈 맛이 기막히다.
백흥암은 경북 영천의 팔공산 은해사 산내(山內) 암자다.
은해사 북서쪽으로 산길을 따라 2.5km쯤 올라간 곳에 있다.
신라 경문왕 9년(869년) 선종 9산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창조인 혜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은해사에서 백흥암 중암암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로도 유명해 주말 등산객들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백흥암은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없는 제한구역이다.
비구니 선원의 수행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곳에 온 지 25년이나 됐어요.
그해부터 지금까지 일을 참 많이 했지요.
처음 왔을 땐 길도 제대로 없었는데 저 길 닦는 데 내 청춘 다 갔어요.
엊그제 온 것 같은데…."
육문 스님의 불사(佛事)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난 81년 육문 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 백흥암은 폐사 직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보물 제790호인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면서 중창불사를 시작했고,극락전 오른편의 심검당(尋劍堂)부터 수리해 그해 동안거 때 선원을 개설했다.
"사람마다 마음을 다 갖고 다니지만 진실로 그 마음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지금 한국불교에 조계종을 비롯해서 스님들이 3만여명은 될 텐데 그중 참선하는 이는 2천명 안팎에 불과해요.
그래도 이들이 불교의 맥을 잇고 정통성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원이 중요한 겁니다."
막상 선원을 열었지만 처음엔 고생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심검당 수리가 끝나기 전에는 선방도 없이 방장실에서 7∼8명이 참선을 시작했고,살림이 빠듯해 기도처로 유명한 인근의 갓바위에서 쌀을 얻어다 먹었다고 한다.
육문 스님은 "찻길을 내기 전이어서 쌀을 얻어올 때면 저 아래 치일저수지에서 반가마씩 나눠 지고 왔다"고 했다.
다른 선원보다 울력(運力)도 많다.
88년 전기가 공급되기 이전에는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땠고,목욕물도 불을 때서 데워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쌀을 제외한 채소류는 직접 길러서 먹는다.
고추만 해도 3백근을 자급자족하며 1천5백포기나 되는 김장용 배추도 직접 재배해서 쓴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게 육문 스님의 지론.장작을 패고,나물을 뜯으며 소채를 가꾸는 등 울력은 선원에서 노동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살림이 빠듯해도 백흥암에선 '돈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도들에게는 초하루에만 개방하고 재(齋)도 올리지 않는다.
법당에는 인등(引燈)도 없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등값을 따로 매기지 않고 신도들이 알아서 내도록 한다.
육문 스님은 "부처님 복이 무량해서 수행만 잘 하면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단언한다.
지금도 백흥암의 선원은 심검당이다.
심검당이란 번뇌를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여느 선원이 사찰의 본채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는 것과 달리 백흥암 선방은 본존불을 모신 극락전과 그 오른편의 조실방,누각인 보화루(寶華樓),선방 뒤편의 후원 등과 다닥다닥 붙어있다.
선객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선원장 영운(靈雲) 스님은 "선방 납자와 후원 대중이 서로 조심하니 오히려 공부가 더 잘된다"고 말한다.
백흥암 선원의 결제 대중은 25명가량.오는 26일 시작되는 동안거에는 24명이 방부(입방 신청)를 들였다.
공양간 등 후원에서 이들을 도우며 수행하는 스님들까지 합치면 50명가량이 겨울을 이 산중에서 나게 된다.
선원에서는 철저히 묵언(默言)을 지킨다.
선방 안에서는 물론 선방 옆 휴식처인 지대방과 차실,도량 전체가 침묵 속에 잠긴다.
물네 살 때 동화사 양진암에서 처음 안거를 했다는 육문 스님이나 선원장 영운 스님은 이판의 소임을 맡으면서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수좌들이다.
육문 스님은 선방을 보살피는 한편 대중들과 안거에 동참한다.
98년 하안거까지 이곳에서 입승(立繩·규율 담당)을 맡았던 영운 스님은 그간 울주 석남사 주지를 하다 임기를 2년여 남겨놓고 백흥암으로 되돌아왔다.
영운 스님은 "주지를 내놓고 나니 이렇게 좋은 것을…"이라며 흡족한 표정이다.
"선방에 처음 왔을 땐 곧 부처가 될 줄 알았지요.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렵다는 걸 느껴요.
(깨달음이) 하루이틀에 이뤄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늘을 보면 구름이 흐르고 또 흐르는데,번뇌망상도 이와 같습니다.
미세한 구름까지 다 걷히고 완전히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육문 스님은 "세상사가 끊임없이 바뀌고 편리해지지만 마음을 모르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마음 닦는 일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나고 죽음(生滅)이 한 조각 뜬구름의 일어나고 없어짐과 같으니 생사를 따르지 않고 홀로 뚜렷한 '한 물건'을 찾으라는 얘기다.
며칠 뒤면 '한 물건'을 찾는 납자들의 열기로 가득 찰 백흥암 선원.요사채 옆 마루와 뜰에서 무말랭이와 청국장,붉은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한가롭다.
영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약속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데 대한 백흥암 선원 주지 육문(六文.58)스님의 꾸지람이다.
< 사진설명 : 가을 햇살을 받으며 백흥암 앞 무밭에 선 주지 육문 스님과 선원장 영운 스님. 김장 담그기에 대해 얘기하는 표정이 여유롭다. >
외출한다는 얘기도 농이 아닌 모양이다.
목도리를 두른 채 밀집모자까지 썼다.
낭패감이 뇌리를 스치는데 스님이 다시 한마디 툭 던진다.
"근데 뭘 취재할 꺼유?"
스님은 외출하려던 발길을 돌려 객을 방으로 안내하고 점심상을 내온다.
나이 어린 비구니 스님이 내온 점심 메뉴는 단촐하다.
쌀과 보리,율무를 섞어 지은 밥과 배추김치,갓김치,감자채볶음,재피잎절임,상추.절집에서 먹는 상추쌈 맛이 기막히다.
백흥암은 경북 영천의 팔공산 은해사 산내(山內) 암자다.
은해사 북서쪽으로 산길을 따라 2.5km쯤 올라간 곳에 있다.
신라 경문왕 9년(869년) 선종 9산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개창조인 혜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은해사에서 백흥암 중암암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로도 유명해 주말 등산객들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백흥암은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없는 제한구역이다.
비구니 선원의 수행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곳에 온 지 25년이나 됐어요.
그해부터 지금까지 일을 참 많이 했지요.
처음 왔을 땐 길도 제대로 없었는데 저 길 닦는 데 내 청춘 다 갔어요.
엊그제 온 것 같은데…."
육문 스님의 불사(佛事)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난 81년 육문 스님이 이곳에 왔을 때 백흥암은 폐사 직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보물 제790호인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면서 중창불사를 시작했고,극락전 오른편의 심검당(尋劍堂)부터 수리해 그해 동안거 때 선원을 개설했다.
"사람마다 마음을 다 갖고 다니지만 진실로 그 마음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지금 한국불교에 조계종을 비롯해서 스님들이 3만여명은 될 텐데 그중 참선하는 이는 2천명 안팎에 불과해요.
그래도 이들이 불교의 맥을 잇고 정통성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원이 중요한 겁니다."
막상 선원을 열었지만 처음엔 고생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심검당 수리가 끝나기 전에는 선방도 없이 방장실에서 7∼8명이 참선을 시작했고,살림이 빠듯해 기도처로 유명한 인근의 갓바위에서 쌀을 얻어다 먹었다고 한다.
육문 스님은 "찻길을 내기 전이어서 쌀을 얻어올 때면 저 아래 치일저수지에서 반가마씩 나눠 지고 왔다"고 했다.
다른 선원보다 울력(運力)도 많다.
88년 전기가 공급되기 이전에는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땠고,목욕물도 불을 때서 데워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쌀을 제외한 채소류는 직접 길러서 먹는다.
고추만 해도 3백근을 자급자족하며 1천5백포기나 되는 김장용 배추도 직접 재배해서 쓴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게 육문 스님의 지론.장작을 패고,나물을 뜯으며 소채를 가꾸는 등 울력은 선원에서 노동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살림이 빠듯해도 백흥암에선 '돈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도들에게는 초하루에만 개방하고 재(齋)도 올리지 않는다.
법당에는 인등(引燈)도 없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등값을 따로 매기지 않고 신도들이 알아서 내도록 한다.
육문 스님은 "부처님 복이 무량해서 수행만 잘 하면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단언한다.
지금도 백흥암의 선원은 심검당이다.
심검당이란 번뇌를 단번에 자를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여느 선원이 사찰의 본채에서 뚝 떨어진 곳에 있는 것과 달리 백흥암 선방은 본존불을 모신 극락전과 그 오른편의 조실방,누각인 보화루(寶華樓),선방 뒤편의 후원 등과 다닥다닥 붙어있다.
선객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선원장 영운(靈雲) 스님은 "선방 납자와 후원 대중이 서로 조심하니 오히려 공부가 더 잘된다"고 말한다.
백흥암 선원의 결제 대중은 25명가량.오는 26일 시작되는 동안거에는 24명이 방부(입방 신청)를 들였다.
공양간 등 후원에서 이들을 도우며 수행하는 스님들까지 합치면 50명가량이 겨울을 이 산중에서 나게 된다.
선원에서는 철저히 묵언(默言)을 지킨다.
선방 안에서는 물론 선방 옆 휴식처인 지대방과 차실,도량 전체가 침묵 속에 잠긴다.
물네 살 때 동화사 양진암에서 처음 안거를 했다는 육문 스님이나 선원장 영운 스님은 이판의 소임을 맡으면서도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수좌들이다.
육문 스님은 선방을 보살피는 한편 대중들과 안거에 동참한다.
98년 하안거까지 이곳에서 입승(立繩·규율 담당)을 맡았던 영운 스님은 그간 울주 석남사 주지를 하다 임기를 2년여 남겨놓고 백흥암으로 되돌아왔다.
영운 스님은 "주지를 내놓고 나니 이렇게 좋은 것을…"이라며 흡족한 표정이다.
"선방에 처음 왔을 땐 곧 부처가 될 줄 알았지요.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렵다는 걸 느껴요.
(깨달음이) 하루이틀에 이뤄질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늘을 보면 구름이 흐르고 또 흐르는데,번뇌망상도 이와 같습니다.
미세한 구름까지 다 걷히고 완전히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육문 스님은 "세상사가 끊임없이 바뀌고 편리해지지만 마음을 모르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마음 닦는 일에 힘쓸 것을 강조한다.
나고 죽음(生滅)이 한 조각 뜬구름의 일어나고 없어짐과 같으니 생사를 따르지 않고 홀로 뚜렷한 '한 물건'을 찾으라는 얘기다.
며칠 뒤면 '한 물건'을 찾는 납자들의 열기로 가득 찰 백흥암 선원.요사채 옆 마루와 뜰에서 무말랭이와 청국장,붉은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한가롭다.
영천=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