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을 상대로 정부가 본격적인 `기강잡기'에 나섰다. 잇단 질책과 경고에도 중소기업 대출행태가 바뀌지 않자 국내은행의 임원과 금융기관을 인수한 대주주에 대한 적격성 심사를 선진국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공개하는 등 압박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은행들이 가계와 중소기업을 상대로 `땅짓고 헤엄치기'식 영업을 해오다 정작시스템 위기가 일어나면 저만 살고 보겠다는 식으로 앞다퉈 대출을 회수하는 집단이기주의 행태를 보이는 것을 더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인식을 깔고 있는 것이다. 금융계에서는 자금중개 기능을 맡고 있는 은행권의 시장규율 확립이 시급한 과제라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정부의 입김이 커지는데 대해 우려하고 있어 관치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은행임원 자격 깐깐히 따진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11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관치를 했다는 부담 때문에 은행 임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격성 심사를 해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형식적으로 돼있는 적격성 심사를 미국과 거의같은 수준으로 강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부총리의 이같은 발언은 일선에서 돈줄을 쥔 은행 간부들이 금융시장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는 `쏠림현상'이 심각한 후진적 금융관행을 근본적으로 깨뜨리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는 국내 은행들의 임원 자격심사 현황과 미국 등 외국의 사례를 수집, 법률상의 자격요건을 보다 엄격히 하고 감독당국의 적격성 심사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은행법 18조는 ▲미성년자.금치산자.한정치산자 ▲파산자로서 복권되지 아니한자 ▲ 금고 이상 형을 받고 집행이 종료 또는 면제된 날로부터 5년이 안된 자등 모두 8개의 결격사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각 은행은 법적인 결격사유만 없으면 적격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선진국의 예를 보면 각 은행이 임원자격을 심사할 때는 범법등 결격사유가 있는지 뿐만 아니라 과거 경영성과나 이력 등 질적인 면을 중심으로 심사하고 있고 그 내용을 감독당국에 충실히 소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시중은행 임원의 임기는 통상 1∼2년이어서 임원 자격요건이 강화되고 적격성 심사가 강화된다면 은행권에 미칠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은행인 국민은행은 강정원 행장의 취임에 따라 부행장 등 임원진에 대한 인사를 앞두고 있다. ◆ 대주주 적격성 심사도 강화한다 이 부총리는 또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기업이나 사람에 대한 적격성 심사도 미국등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강조했다. 이는 국내 금융산업 발전이나 시스템 안정보다는 단기차익을 목적으로 국내 은행을 인수한 외국계 투자펀드를 겨냥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외국계 투자펀드에 소유권이 넘어간 모 시중은행은 건전성을 이유로 다른 은행들에 앞서 중소기업 대출을 회수하는 등 이기주의적 행태를 보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은 적격성 심사요건이 엄격해 단기수익률에 치중하는 사모펀드가 시중은행을 인수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게 금융계의 지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공적자금 부담을 줄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기 때문에 은행 매각과정에서 인수자에 대한 적격성 심사가 다소 미흡했었던게 사실"이라며 "국내 은행을 인수한 외국계 펀드의 경우 6개월마다 적격성 심사를 하도록 돼있는 만큼 앞으로 보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적격성 심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금융을 `기업금융 리딩뱅크'로 이처럼 은행권에 대해 정부가 압박의 강도를 높이면서 매각을 앞둔 우리금융지주의 향배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대.중소기업을 포함한 기업금융 비중이 가장 높다는 점에서 우리금융지주가 국내 기업금융을 리드하는 `선도은행'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이 부총리는 "우리은행은 기업금융이 가장 많은 은행"이라며 "민영화 일정을 연기하지는 않겠지만 지배구조를 반듯하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금융을 단기수익을 쫓는 투자펀드나 특정재벌에 넘기기 보다는 선진국의 리딩뱅크와 같이 주주들간에 분산된 소유구조를 갖는 방향으로 민영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수익성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행의 공공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특히 우리금융은 민영화를 하더라도 기업금융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부총리는 취약한 기업금융을 떠받치는 차원에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