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8) 남중수 KTF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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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수(南重秀-49) KTF 사장은 딱 한번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대학(서울대 경영학과) 1학년 때다.
급히 덕수궁 근처에 갈 일이 있어 택시를 탔다. 거스름 돈을 받아 돌아서는 순간 경찰이 갑자기 다가와 택시기사를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분명 남 사장 혼자 타고 왔는데,불법 합승이라며 택시기사에게 딱지를 떼려들었다.방금 탄 승객을 원래부터 타고있던 손님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에 그냥 돌아설 수가 없었다.
합승이 아니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남 사장에게도 눈을 부라렸다.순간적으로 열이 뻗쳐 경찰의 팔을 비틀어 버렸다.
결국 공무집행 방해죄로 연행돼 남대문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 것.난생 처음 끌려들어간 유치장에서 취객들의 고함 속에 양동 사창가의 너저분한 군상들을 보게 된다.
밤이 이슥해지면서 유치장안도 조용해졌지만 대학생 남중수의 가슴엔 뜨거운 것이 계속 치밀어 올라왔다.
"제겐 그날 밤이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데 '나는 억울한 택시기사 한 사람도 제대로 돕지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남을 도우며 살려면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생각했어요."
남중수 사장은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자주 수업을 빼먹었던 탓에 학사경고를 받고 장발단속을 피하느라 경찰만 보이면 도망다니는,그런 학생이었다.
어릴 땐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 논어 등의 고전을 배우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웬만한 한자는 다 섭렵했다.
고등학교(경기고) 시절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파한 노자의 도덕경에 심취했다.
유치장에서의 하룻밤 이후 그에겐 예전의 장난스러운 치기가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세상 공부'를 해야한다고 결심했다.
여름 방학때는 시멘트 화물트럭의 조수로 일했다.
박달재를 넘어 서울과 문경을 수없이 오고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해인사에서 몇달간 불교서적과 씨름한 적도 있다.
경기고 1년 후배이자 서울대 상대 동문인 최중경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은 "학창시절의 남 사장은 무척 폭이 넓고 의협심이 강했다"며 "모나지 않은 성격에 친화력도 좋아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남 사장은 대학졸업 후 삼성그룹 공채시험에 합격했지만 폭넓은 경험을 쌓기 위해 장관 비서실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최광수(69) 무임소 장관실이었다.
그랬던 남 사장이 오늘날 무한경쟁 통신시장의 승부사로 변신한 것은 꽤 흥미롭다.
최 장관이 81년 체신부 장관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남 사장도 체신부 비서실로 옮겨가게 됐다.
통신시장의 역동성과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순식간에 매료됐다.
그해 전기통신공사가 한국통신(현 KT)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체질 쇄신에 나서자 주저없이 창립멤버로 합류했다.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는'꿈을 이루기 위해선 전공을 살려 기업에 몸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직책은 경영기획과장. 한국통신 경영체제에 대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짜는 것이 임무였다.
거대 공기업의 개혁 청사진을 그리는 일은 무척 보람있는 일이었다.
기왕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라면 한국통신을 미국 AT&T나 영국의 브리티시텔레콤(BT)같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는데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4년쯤 지나자 남 사장은 자신의 역량이 모자란다고 느꼈다.
대학때 어설프게 배웠던 경영학 지식으로는 급변하는 통신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84년7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86년 듀크대에서 경영학 석사를,90년 매사추세츠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한국통신은 민간기업으로 이직하는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사내 유학제도를 운영하기 시작한 터였다.
이제는 자신이 회사에 보답할 차례였다.
남 사장은 개혁의 중심에 섰다.
욕도 많이 먹고 회사를 떠날 위기도 있었지만 한국통신이 관료적 문화를 벗고 민간기업으로 변신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90년 국제통신사업본부 영업 1부장(2급)을 거쳐 91년 춘천전화국장 발령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기업 최초로 '사원 중역회의'라는 것을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기업들이 주니어보드를 운영하고 있지만 당시 한국통신 지사가 이런 제도를 도입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14 안내원을 포함한 3백여명의 직원들과 한달에 두번씩 '호프데이'를 열어 서비스 마인드도 불어넣었다.
93년 경영계획국장을 맡아서는 한국통신의 시내외통화 요금 조정을 주도했다.
당시 유선전화 시장에 신규 진출을 준비하고 있던 데이콤에 맞서 시내 요금은 현실화하고 시외-국제요금은 내렸다.
그 결과 한국통신은 시내전화 부문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고 데이콤의 도전을 차단할 수 있었다.
95년 인사국장 때는 인사위원회 수를 종전 7~8명에서 30여명으로 늘리고 위원 명단을 위원회 개최 하루 전에 통보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개편했다.
그때부터 사내에선 '너무 설친다'는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표를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어차피 한국통신의 민영화는 예정된 길이었고 민영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공기업의 비효율적인 관행을 혁파해야 민간시장에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98년 DJ정권이 들어서면서 'KS(경기고-서울대)인맥'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98년 충북본부장,99년 국방대학원 파견 등으로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2000년 IMT 사업본부장으로 컴백했고 한국통신프리텔(현 KTF)의 비상임 이사도 맡았다.
한국통신은 민영화 완결을 앞두고 일찌감치 경쟁시장에 눈떴던 남 사장의 경험과 안목을 필요로 했다.
IMT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던 정보통신부와의 마찰도 불사했다.
당시 정부는 동기식 사업방식을 원하고 있었지만 시장의 판단은 비동기식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설전과 설득을 병행해가며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고 마침내 IMT-2000 비동기식 사업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이같은 승부사적 기질과 집요한 일처리 솜씨를 가진 남 사장은 경쟁사들에 두려운 존재였다.
모 업체의 경우 지난해 초 KTF 사장 공모를 앞두고 "제발 남중수만 되지 말라"고 바랐다는 얘기도 들린다.
남 사장에게 CEO가 된 비결을 물었더니 도덕경에 나오는 '거선지(居善地)'와 '동선시(動善時)'라는 글을 인용했다.
전자는 '하늘이 아니라 좋은 땅에 있으라'는 뜻으로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후자는 '행동은 때에 맞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남 사장은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동창들이 외면했던 통신업계에 홀로 뛰어든 사람이다.
스스로 준비하고 무장해 외로운 싸움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이제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남 사장은 40여년 전 자신이 초등학생일 때 부모님들이 수의(壽衣) 맞추는 일을 의논하던 얘기를 꺼냈다.
"어린 마음에 그 얘기가 너무 슬펐지만 부모님들은 '끝'의 중요성을 알려주고자 하셨어요.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끝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는 가르침이었지요."
그는 남을 돕겠다는 젊은 시절의 생각을 아직 잊지않고 있다.
주변에 알려지기를 꺼리고 있지만 외부강연으로 받는 강사료는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아무리 거절해도 무작정 보내오는 명절 선물은 모조리 외국인 노동자의 쉼터로 보내고 있다.
"이 정도로 꿈을 운운할 수는 없죠.좋은 기업을 만들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할 일이지만 당장 오늘 사장을 그만두더라도 초심(初心)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도움 받은 것은 대리석에 새기고 도움을 준 것은 모래에 파묻을 겁니다."
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