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청준의 문우(文友) 나한봉은 이청준의 작품에 대해 "나는 그가 제 재주로만 소설 쓰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손만 빌리고 진짜 뒤에서 소설을 쓴 것은 고향과 어머니시더구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한봉의 말처럼 이청준을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키운 것은 그의 유년시절 고향 마을과 마을 사람들,그리고 어머니였다. 이청준의 산문집 '손때 묻은 이야기 아름다운 흉터'(열림원)는 장롱 깊숙이 숨겨 놓은 흑백사진처럼 시간의 풍화작용에 이리저리 찢기고 빛바랜 유년시절의 이야기 모음이다. 어느 봄날 새벽 슬픔도 없이 홍역으로 죽어간 세 살짜리 아우,1949년 늦여름 여객선 한 척을 타고 찾아온 수줍음 많던 여선생님,광기의 시대 반동으로 몰려 몰살당한 외가댁 식구,가성과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만병통치약을 팔던 떠돌이 약장수들,도회지의 친척집에 하숙하던 아들에게 보낼 것이 없어 게자루를 보냈던 어머니 등 그리움의 대상이자 떠올리기조차 싫은 흉터이기도 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그 오고 떠남이 기약없는 떠돌이들의 행로에서 그때마다 가파르고 궁핍스런 삶의 질곡을 벗어나보고 싶은 자신들의 고달픈 꿈을 대신 위로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랬길래 아이들은 쫓아도 가지 않고,어른들은 가짜 약료나 거짓 약속의 말들을 따지려들지 않았지 않았을까'('궁핍스런 시대의 동화' 중) 그러나 "세월이 흘러,부끄럽기만 하던 흉터들이 거꾸로 아름답고 떳떳한 자랑거리로 변해갔다"는 고백처럼 이청준은 부끄러운 흉터에 지나지 않던 상처와 인물들을 감싸안으며 풍요와 문명의 이기에 눈먼 오늘날 사람들을 그의 먼 유년시절 마을로 데리고 간다. 허기진 얼굴을 하고 있지만 별들과 별똥별로 가득한 그 곳 유년의 밤하늘 아래서 작가는 잃어버린 어린날의 순수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