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으로 불리는 1997년말 외환위기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 판단과 금융회사들의 무분별한 국제금융 확대,기업들의 과잉투자 실패가 겹치면서 일어난 말그대로 총체적인 위기였다.


한보등 대기업의 잇따른 부도로 국내 금융시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각종 강연과 연설을 통해 "기초체력(펀더멘털)은 튼튼하다"며 환율방어에 급급했다.


1997년 7월 태국에서 발생한 아시아 외환위기가 북상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위기가 아니다"는 주장만 폈고 결국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무역수지는 1990년 적자(48억달러)로 돌아선 이후 1997년까지 8년 연속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1995년에는 1백억달러,96년에는 2백6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무역적자가 심화되고 있었다.


1996년의 경우 무역적자가 2백억달러를 넘어선 데에는 전년대비 수출단가가 60.4% 폭락한 반도체 부진이 컸다.


이에 따라 대외지불부담(외채)은 1994년 8백87억달러에서 1996년 1천6백43억달러로 불과 2년만에 두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정부는 외채급증의 주 요인이었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환율을 과감하게 올려야 했지만 반대로 갔다.


원.달러 환율은 1996년 평균 8백4원50전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1997년 들어서도 환율을 묶는 정책을 고수,동남아지역 외환위가 터진 97년 3분기에도 달러당 8백98원60전으로 방어하는 정책을 폈다.


환율 상승을 방치할 경우 물가 상승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달러로 환산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밑으로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무리한 환율방어 정책은 결국 국제금융 투기꾼들이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높은 원화가치를 유지하려 했던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기업의 투자마저 위축시켰다.


설비투자는 1996년 8.3%(전년대비)늘어났으나 1997년 1분기부터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97년 1분기 수출은 전년 같은기간보다 5% 감소하는 부진을 보였다.


재정경제원은 국내 경제가 어려워지고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도 그해 7월초 국내 종합금융회사에 대한 행정규제를 완화하고 투신사의 환매수익증권 환매수수료를 자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7월 25일에는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제도 개편"을 골자로 한 금융개혁법률을 입법 예고하면서 재경원와 한은이 외환위기를 목전에 두고 밥그릇 싸움까지 벌였다.


이같은 와중에 외국자본은 계속 빠져나갔고,외국의 금융회사들은 한국에 빌려줬던 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부는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조절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12월 25일 IMF 및 주요 선진국들과 자금 조기지원에 합의했다.


한국경제신문등 언론은 이미 7월께부터 동남아 외환위기가 북상한다는 등의 경고를 내보냈으나 정부는 번번이 구조개혁이 먼저라며 묵살하고 말았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