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된 안동(安東)권씨 권진(權瑨) 일가가 화를 당하면서 잃어버린 분묘를 찾기 위해 권씨 후손들이소송을 내 1심과 2심에서 모두 이겼다. 고려 말기 공민왕이 만든 자제위(子弟衛)의 미소년들이 후궁들과 불륜 관계에빠지는 등 풍기가 문란해졌고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益妃)를 임신시키기까지 이른 것이 이 사건의 발단. 공민왕은 이를 무마하려고 홍륜과 밀고자인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 오히려 홍륜에게 시해당하고 이 과정에 연루된 자제위 권진(權瑨)이 죽고 그 아버지도유배지에서 살해당하는 등 일가가 화를 입었다. 이에 권진의 형 권적(權適)의 사위인 청주 한씨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가몰락한 처가를 수습해 권진의 할아버지인 권준(權準)의 제사를 잇게 된 것이 1374년께의 일이다. 6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분묘 위치를 잊은 권씨 후손들은 청주(淸州) 한씨 문열공파 종중이 관리하는 경기도 파주시 서곡리 임야 분묘 2기를 찾아내 이중 하나가권준의 분묘라 주장하며 2002년 2월 분묘기지권 확인 청구소송을 냈다. 법원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국고고학회, 정신문화연구소 등의 사실조회를 통해 묘지에 얽힌 역사 복원작업을 해나갔다. 임야는 일제시대 조선임야 조사령에 따라 청주 한씨 종손이 소유권을 확인한 기록이 있었고, 분묘 2기중 하나는 `문열공 한상질지 묘(文烈公 韓尙質之 墓)'라 씌인비석이 있었지만 다른 하나는 아무런 비석이 없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비석이 있는 분묘 근처와 분묘 안에서 묘지석 조각들을 출토해 복원했고 `공민왕 즉위 다음해 공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왕이 상사(喪事)를예에 따라 치르게 하고 시호를 창화(昌和)라 했다'는 내용과 `내가 자효사(慈孝寺)를 고쳐지으니 내 전신(前身)이 창화가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안동 권씨 족보에서는 권준의 묘가 창화사동(昌和寺洞)에 있다는 기록이 발견됐고 비석이 있던 분묘 안에서 고려풍 벽화도 발견됐다. 서울고법 민사6부(재판장 송진현 부장판사)는 "봉토 방식과 내부 벽화, 묘지석등을 살펴보면 비석이 있는 분묘는 권준의 것임을 알 수 있고 역사적 사실에 비춰봐도 청주 한씨 종중원들이 권준의 제사를 대신 잇다가 1400년 사망한 한상질의 분묘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26일 원고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비석에 `문열공 한상질지 묘'라고 음각돼 있지만 이 비석은 한상질사후 300년이 지난 시점에 제작됐다는 사실은 피고도 인정하므로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두 분묘 모두 한상질 사후 600여년간 모셔온 분묘"라고 주장했다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패소한 청주 한씨 문열공파 종중은 대법원에 상고, 최종심 결과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김상희 기자 lilygardene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