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화폐 발행을 위한 한국은행의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 최근 들어 금융회사 이용고객의 60% 이상이 고액권 발행을 원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데 이어 11일에는 박승 한은 총재가 '화폐 선진화' 방안을 연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경우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뇌물수수가 용이해진다는 점 등을 들어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만만찮은 상황이다. ◆ 경제 규모와 안 맞는 화폐단위 고액권 발행이나 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에 대한 필요성은 현재 최고액권으로 통용되고 있는 1만원권의 '장기 집권'에서 출발한다. 1만원권이 등장한 것은 1973년. 이후 30여년 동안 물가는 평균 10배 이상 오르고 경제 규모는 1백배가량 커졌다. 1만원권이 처음 등장할 당시 1만원이던 쌀 한 가마(80㎏) 가격이 지금은 20만원을 웃돌고 20원 하던 버스요금은 7백원이 됐다. 앞으로 몇 년 안에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조'단위로도 부족해 명칭도 생소한 '경' 단위를 써야 할 정도다. 경제 규모와 화폐단위 사이의 이같은 괴리는 10만원권 자기앞수표가 메우고 있다. 1만원권은 한 번 발행하면 3∼4년 이상 쓸 수 있지만 수표는 재사용이 불가능해 유통기간이 평균 1주일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해마다 수표 발행과 관리에 6천억원 정도를 허비하고 있다. 대미 달러 환율이 1천원대를 웃도는 것도 국가신인도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는게 한은의 설명이다. 이밖에 국내 화폐는 위폐방지 장치가 허술해 위조에 노출돼 있다는 점도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야 하는 이유로 꼽힌다. ◆ 만만찮은 '시기상조론' 한은은 고액권 발행과 위조 방지,화폐단위 절하(디노미네이션) 가운데 어느 한두 가지만 시행하는 것보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게 시간과 비용절감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10만원권만 발행해도 위조방지 장치를 추가하고 현금 입ㆍ출금기기(ATM)나 자동판매기의 '액면인식 센서'를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오는 4월 총선이 끝난 뒤 재정경제부와 화폐 선진화 조치를 위한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갈 계획이다. 정부도 새로운 화폐 발행에는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거나 고액권을 발행할 경우 신권을 찍는데 많은 돈이 들 뿐만 아니라 금융회사의 현금 지급 관련 기기 변경이나 각종 회계 프로그램과 장부 등을 교체해야 하는 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물가 상승에 대한 걱정도 있다. 한은은 그러나 "유로화 지역의 경우 유로화 도입에 따른 물가상승 효과는 0.2%포인트에 불과했고 미국이나 일본은 고액권이 있지만 부패가 우리나라보다 적다"며 "과소비나 부패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