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말한 적이 있죠. 그런데 지금 기업인들 사이에선 '더이상 기업을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어요." 모 그룹 재무를 총괄하고 있는 A씨. 그는 자신이 "요즘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말했다. "막말로 정치인들에게 돈 뜯기고 그걸로 검찰에 불려가 망신당하고…. 물론 우리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범죄집단으로 매도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총수 소환설에 시달리고 있는 또 다른 기업의 B씨. 그의 하소연도 다를 바 없다. "기업이라는 조직이 이렇게 허약한 줄 몰랐어요.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발밑이 이토록 허망하게 흔들릴 줄도…. 검찰이 대선자금 외에 과거지사까지 다 들춰낸다면 어떤 기업이 견뎌내겠어요. 월급쟁이인 내 심정이 이 정돈데 오너는 오죽하겠어요. 참담함 그 자체지요. 아마 기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B씨의 얘기에는 뭔가 잘못돼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얽힌 실타래 같은 현실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갑갑함과 불안이 짙게 묻어났다. 동시에 검찰 수사방식이나 우리 사회의 반(反)기업정서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재계는 그동안 세간의 비판적 여론을 의식, 숨죽이며 검찰 수사를 지켜봐왔다. 그러나 정치권을 겨냥하겠다던 검찰의 칼날이 기업에만 집중되자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일부 기업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과연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분위기도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차라리 본사와 사업 기반을 중국으로 옮기는게 낫겠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강신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대행이 각 정당을 찾아다니며 정치자금 제도의 근본적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이런 위기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일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이 삼성을 대상으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0여년 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전달한 행위가 소액주주에 피해를 입혔다고 인정된다'며 7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뺨을 맞아야 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한심하기만 할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