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은 민주주의의수호자인가 파괴자인가?" 소련 붕괴이후 근 2년간 치열하게 전개됐던 보혁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던 1993년10월 `의회 반란' 유혈진압 사건의 어두운 진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옐친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일간 가디언이 4일 전했다. 10년전 10월 4일 옐친 당시 대통령은 의사당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던 보수파 인사들을 탱크를 동원해 무력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소한 123명이 숨졌다.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파시스트를 비롯 반옐친 진영의 행동대원들이 무참하게 사살되고 핵심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됐지만 소련 붕괴 후 무기력증에 빠진 국민은 이 사건을 외면했다. 서방은 유혈진압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옐친 대통령은미치광이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이겨낸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묘사됐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은 옐친에 반대하는 정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압살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행위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국민의 열광적 지지 속에 대통령이 된 옐친은 1993년 9월 자신의 개혁정책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온 보수파들의 근거지인 의회를 해산하는 한편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에게 제왕적 권한을 부여하는 새로운 헌법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보수진영은 의사당 건물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옐 친을 탄핵하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당시 부통령에게 전권을 이양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봉기의 선봉에 선 루츠코이 부통령은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와 투쟁을 벌일 것을 촉구했지만 호응이 없었다. 국민의 지지를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물도 전기도 끊어진 상태에서 10일째 농성이 계속된 10월3일 의사당을 에워싼경찰 저지선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루츠코이 부통령은 인근 오스탄키노 TV 방송센터를 장악할 것을 지시했다. 방송센터는 옐친에 충성하는 정예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반옐친 진영에 의해 손쉽게 장악돼 크게 파괴됐고 방송은 중단됐다. 옐친은 방송센터 파괴사건 다음날인 10월4일 군지휘관들에게 무차별 진압을 명령했고 저녁나절까지 계속된 치열한 전투로 의사당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최소한 123명이 숨지고 루츠코이 등 반옐친 진영 지도자들은 체포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옐친은 개헌을 강행,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됐지만 개혁의 명분 아래 권력을 남용하고 국가 핵심산업들을 소수의 경제엘리트들에게 팔아치워 정경유착의 씨앗을 뿌리는 어두운 유산을 남겼다. 10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는 부분은 유혈진압에 이르기 직전까지벌어진 폭력사태가 반란 진영이 아니라 옐친에 충성하는 군대와 경찰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발됐다는 것이다. 유혈진압의 명분을 쌓기 위해 군경이 폭력사태를 유도했으며 옐친 대통령은 사태악화를 막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를 발동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의회 반란 사건 담담 검사였던 레오니드 프로슈킨은 가디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유혈진압의 기폭제가 됐던 반란 진영의 오스탄키노 TV 센터 점거 및 파괴 사건은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폭로했다. 반란 진영 행동대원들의 화기는 소총 20정과 유탄발사기 1정에 불과한 반면 옐친 진영의 수비대는 6대의 장갑차에 450명의 중무장 경비병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 프로슈킨은 "반란 세력의 진입을 막아야할 수비대가 장갑차를 동원해 이들을 방송센터로 호위했고 이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방송은 중단돼 있었다"면서 "혼란과 폭력사태를 유발하기 위해 모든 것이 중앙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알렉세이 카잔니크는 반란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옐친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외압을 가했다고 밝혔으며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한탱크병은 의사당이 체첸반군의 공격을 받고 있으며 경찰관들이 가로등에 목이 매달려 처형당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출동했다고 말했다. 정경유착과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라는 부정적 유산을 낳은 이 사건과 관련, 인권운동가인 드미트리 푸르만은 "옐친은 의사당을 피로 물들인 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 순간부터 옐친은 정권교체는 감옥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계자에게 정권을 승계했다"고 말했다. (런던=연합뉴스) 이창섭특파원 lc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