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루트비히 게오르크 브라운 독일 연방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27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 소재 도이체방크 빌딩에서 '독일 경제,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 한국경제신문 주최로 열린 이날 대담에서 박 회장은 독일식 사회경제시스템의 폐단을 지적하며 '시장경제로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고, 브라운 회장은 "한국은 산별노조 시스템으로 실패를 맛본 독일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권고했다. 브라운 회장은 전기 면도기로 유명한 다국적 전자회사 브라운그룹의 창업회장이다. ----------------------------------------------------------------- 박 회장 =한국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할 당시 독일의 경제발전 모델에서 많이 배웠다. '라인강의 기적'을 보면서 '한강의 기적'을 다짐했다. 그러나 한때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독일 경제가 요즘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특히 기업들의 투자 부진에 따른 성장잠재력 쇠퇴가 심각한 것 같다. 내가 아는 많은 독일 기업인들은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 신규 채용도 꺼리고 있다. 브라운 회장 =독일 기업들의 투자 부진은 심각한 수준이다. 해외로 공장을 옮기거나 외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체코와 폴란드는 인건비가 독일의 3분의 1 내지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고 교역장벽이나 세금 차이도 없다. 독일 기업들은 유럽의 지역 통합과 세계화로 고통받고 있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이같은 변화를 깨달아야 한다. 노조가 바뀌지 않으면 독일 기업들은 모두 프라하나 바르샤바로 옮겨갈 것이다. 박 회장=독일에서는 특히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브라운 회장=동독지역의 실업률(18%)은 구조적 문제로 인해 매우 높아졌다. 옛 서독지역의 많은 기업들이 지역 통합 차원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동독지역에 투자했다. 공장을 옮기는 대가로 많은 보조금을 받고 있지만 생산성이 낮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동일한 수준의 월급과 근로시간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하고 있다. 생산성이 다른데도 동일한 산업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동일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다. 박 회장 =한국에서는 회사별로 단체협약과 임금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회사 차원이 아니라 산업별로 단체 협상과 임금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독일식 노사관계를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브라운 회장 =절대로 독일방식을 채택해서는 안된다. 특정 산업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기업들은 산업별 협상을 도입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중간 또는 하위 수준의 회사들은 생산성이 높지 않고 혁신적이지도 않다. 만약 한국이 산업별 노사협상 제도를 선택한다면 많은 기업들이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출 기회를 상실할 것이다. 박 회장 =지난 90년대 중반 기독교민주당의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정권 말기에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여러 가지 경제개혁을 추진했으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사회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았다. 브라운 회장 =슈뢰더 정부는 90년대 말 세계경기 호황으로 독일 경제도 잠시 호전되자 자신들의 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으로 오판했다. 그러나 이후 경기가 침체기로 접어들자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고, 독일인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정부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 박 회장 =유럽 전역에서 연금제도 개혁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세다. 독일의 연금과 실업보험 제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회가 노령화됨에 따라 현행 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독일 정부도 최근 공표한 '아젠다 2010'에서 사회복지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업급여 지급기간을 단축하고 실업보조금과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통합하는 안을 제시했다. '아젠다 2010'으로 만족할 수준의 개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브라운 회장 =독일의 사회보장 제도는 1880년대부터 시작됐다. 오랜 기간동안 서서히 발전해 왔고 지금은 연금 실업보험 의료보험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여러 가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사회복지 비용 부담이 너무 커졌다.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짐은 더 무거워졌다. 사회복지 제도를 개인의 책임을 늘리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 정부안(아젠다 2010)보다 더 많은 개혁이 있어야 한다. 국민들도 이같은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박 회장 =미국도 80년대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 기업들은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개혁에 성공했고 90년대 '신(新)경제'라는 호황기를 누렸다. 반면 일본은 개혁을 하지 못했고 90년대에는 '10년의 잃어버린 세월'을 보냈다. 독일은 지금 어떤 상황이라고 보는가. 브라운 회장 =미국이 시도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국이 생존을 위해 재빨리 변신한 사실만큼은 우리도 배워야 한다. 미국은 기업내 잉여 인력을 과감히 해고했고 생산성을 높이는데 힘썼다. 그 결과 90년대의 경기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독일은 '평생고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본과 비슷한 철학을 갖고 있다. 일본은 이해관계자들의 압력과 관료주의 때문에 개혁에 실패했다. 독일은 일본의 잘못된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박 회장 =독일의 상당수 국민들과 노동조합들은 슈뢰더 정부가 친(親)노동자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브라운 회장 =독일의 노동조합들은 국가 내에서 또 다른 국가를 형성하려 하고 있다. 민주적인 통제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노동조합은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박 회장 =지난 70년대 말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등장했을 때 '영국병'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일부에서는 지금 독일이 이와 유사한 '독일병'을 겪고 있는게 아니냐고 얘기하고 있다. 브라운 회장 =정치 리더십이 문제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38%의 득표만으로도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정당이 연합을 해야 한다. 독일은 영국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기가 어렵다. 2차 세계대전 후 집권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독일 통일을 달성한 콜 총리는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지만 외부문제들에 국한됐다. 국가 내부의 개혁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