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천5백억원의 외국 자본 앞에 자산규모 47조원의 재계 서열 3위 SK그룹이 쩔쩔매고 있다. SK가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다른 대기업들도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재계는 SK(주)에 대한 크레스트 증권의 지분 매입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도 놀랍지만 경영참여를 요구하고 시민단체의 힘을 이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태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는 이번 사태가 수백억달러의 현금 동원력을 갖고 있는 해외 펀드들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눈길을 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에 긴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필요한 내부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지만 SK㈜ 경우처럼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나 출자총액제한에 따라 의결권이 제한되는 지분이 있을 경우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부 방침에 따라 금융계열사들의 의결권 제한이 현실화되면 경영권 방어 여건은 더욱 취약해질 전망이다. ◆약점을 파고드는 외국계 자본 소버린측은 최고경영자의 배임과 계열사의 분식회계 등으로 SK그룹의 도덕성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는 틈을 타 지분 매입에 나섰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는 "소버린은 SK측에 대한 경영 쇄신 요구를 명분으로 외국계 자본에 대한 거부반응을 희석시키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며 "우량 국내기업들이 갑자기 부실해지거나 도덕성 문제에 직면할 경우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국제금융 업무에 종사했던 현대중공업 재무팀 문종박 이사도 "평소 백기사(우호 세력)로 여기고 있던 외국인이 경영에 불만을 품고 흑기사(적대 세력)로 돌아서는 일은 해외에서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회장 일가를 제외하고는 삼성전자 지분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캐피털그룹(6.4%)이나 현대차의 2대 주주인 다임러크라이슬러(10.5%)의 경우도 지금은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백기사 찾기 쉽지 않다 상당수의 기업들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삼고 있지만 정작 자사주를 통해 우호세력을 찾는 기업은 많지 않다. 해외 기업이나 거래선들과 접촉하기엔 신뢰도가 낮고 국내 기업들 역시 매수 여력과 경쟁 여건 등의 문제로 마땅한 대상을 물색하기 어렵다. 자사주를 갖고 있는 기업들끼리 지분 맞교환을 하는 방안도 있지만 한때 같은 그룹 계열사였던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사례를 제외하곤 특별한 사례가 없다. 이같은 여건 속에서 10.4%의 자사주를 갖고 있는 SK㈜가 단시일 내에 백기사를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재계 관계자는 "다급한 사정을 악용한 가격 후려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자사주를 많이 갖고 있는 기업은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체계적인 대응방안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보다 근본적으로 출자총액제한 등 과도한 규제가 풀리지 않고서는 외국자본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