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나사인생이 빛을 발하기까지 임정환 사장이 걸어온 길은 어려운 시대를 대변하는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16세가 돼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주파'란 엔진공장에 취업,영도중과 동양공고,문리사범대(현 명지대)를 졸업할 때까지 8년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대방동 집에서 영등포 공장까지는 걸어서 2시간 거리. 새벽같이 출근했다 일이 끝나면 찬물 한바가지 퍼 마시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보통 자정을 넘겼다. 고학생활을 하는 청년 임정환이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것밖에 없었다. 이때 시작된 하루 4시간 자기는 그의 평생 습관이 됐다. 그나마 4시간도 모든 걸 잊고 잠드는 시간은 아니었다. 개발 아이디어에 대한 고민은 꿈속에서도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의 머리맡엔 언제나 수첩과 필기도구가 놓여 있다. 잠이 들다가도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메모한 노트가 어느새 수십권이 돼 금고에 가득하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나올 때의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백만장자,억만장자가 안부럽죠." 임 사장은 아이디어를 직접 제품으로 만들고 싶어 1961년 범양금속(90년 명화금속으로 법인전환)을 창업했다. 자신의 사업을 갖게 되면서 일하는 재미에 빠진 임 사장의 결혼사연도 유별나다. 그가 첫선을 본 건 67년,노총각으로 접어드는 31세 때였다. 좋은 사람 있으니 맞선 한번 보라고 강권하던 사람이 어느 날 대뜸 나타나더니 "자네 어떻게 된건가?"라며 따지듯 물었다. 선보기로 한 약속도 잊은 채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약속날을 잡아 지금의 아내 이영자씨를 만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처남은 임 사장의 성실성과 집념을 높이 평가해 1주일만에 약혼식날을 잡았다. 그러나 일에 몰두해 있던 임 사장은 약혼식날 마저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오늘이 약혼식날 아니냐?"는 직원의 얘기를 듣고서야 허겁지겁 달려나가 노총각 신세를 면했다. 임 사장이 '나사박사'가 된 건 70년대의 척박한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됐다. 당시 기계제조업은 원자재 값은 연일 오르고 제품 값은 내려 2중 압박에 시달렸다. 문닫는 공장은 늘고,뼈빠지게 야근을 해도 보람이 없었다. "평생 이짓 해봐야 빚에 허덕이다 마누라와 새끼도 못 먹여 살릴 것"이란 주위 사람들의 말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부인 이씨도 안타까운 마음에 "기름투성이 옷입고 고생하며 그 작은 나사 만들어 어떻게 살겠느냐"며 "크고 제값 받는 물건을 만들어 보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독자기술'만이 살 길임을 깨달았다. 최규술 기자 kyus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