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 보증수표' 한석규의 4년 만의 복귀, 체코와 포르투갈 현지 로케, 분단상황을 소재로 한 줄거리, 톱스타 고소영의 가세. 이만하면 23일 개봉될 「이중간첩」(제작 쿠앤필름ㆍ힘픽쳐스)이 「쉬리」의 신화 재현을 꿈꿀 만한 초대형 프로젝트로서 손색이 없다. 「가문의 영광」이나 「색즉시공」 등 가벼운 코미디의 성공을 지켜보며 불안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던 영화팬들도 정통 드라마의 부활을 기대할 법하다. 영화는 79년 4월 김일성광장에서 펼쳐지는 북한의 인민군 창설 기념 퍼레이드화면으로 시작된다. 절도있는 동작으로 분열 행진을 벌이는 대오의 앞자리에 림병호(한석규)의 모습이 비친다. 이어 장소는 바뀌어 80년 6월 동베를린 검문초소. 북한대사관에 근무하던 병호는 북한측 요원의 추격을 피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서울로 송환된 그는 위장귀순의 의심을 받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남한의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된다. 원하던 자유를 찾아왔으나 림병호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가 가시지 않는다. 매일 밤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이던 어느날 북한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비로소 기쁨에 몸을 떤다. 병호는 고정간첩인 라디오 DJ 윤수미(고소영)와 접촉하며 북파작전의 정보를 유출하는 등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그의 이중생활은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이야기의 모티브는 67년 판문점을 통해 극적으로 남하했다가 69년 해외로 도피하던 중 홍콩에서 붙잡혀 압송된 이수근의 이야기(당국에서는 위장귀순한 간첩으로발표했으나 나중에 남한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해 탈출을 시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음)와 흡사하다. 병호가 반공강연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민국 만세"를외치는 장면이나 이수근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죽은 공비'의 그림을 그리던 모습은 일맥상통한다. 병호가 제3국을 선택하는 대목에서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리게 한다.비록 주인공 이명준과는 다른 행로를 겪지만 두 개의 조국에서 버림받은 인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병호는 실존인물 이수근이나 가공인물 이명준과는 다른 캐릭터를 지니고있다. 자신이 용도폐기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철저한 공화국의 일꾼이며, 이념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비치지 않는다. `제3국행'도 안전과 사랑을 고려한선택일 뿐이다. 「공공의 적」 시나리오를 통해 새로운 형사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한 김현정 감독은 데뷔작인 「이중간첩」에서도 림병호의 캐릭터에 가장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에 따라 「쉬리」의 박무영(최민식)이나 「공공경비구역 JSA」의 오경필(송강호)에서 비치는 전형성은 어느 정도 탈피했는지 모르지만 현실감이나 공감대를 자아내기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엿보인다. 한석규의 연기력 부족을 탓하기보다는 가공이면서 가공으로 느껴지지 않는 시공간의 특수성을 감안할 필요도 있겠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탄탄함이 느껴지는 것과 달리 구체적인 시퀀스에서는 긴박함이 떨어진다. 생략과 비약을 빈번하게 사용해 빠른 템포를 취하면서도 지루한 대목이 엿보이는 것도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임팩트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화려한 볼거리나 박진감 넘치는 액션 없이 잘 짜여진 정통 드라마 한편을 만들어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