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16:49
수정2006.04.02 16:50
2002 한.일월드컵은 두가지 이변을 낳았다.
하나는 세계 축구계의 변방에 머물렀던 한국 축구가 4강에 오르며 당당히 주류로 자리매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엄청난 수의 '12번째 선수', 즉 대규모 응원단의 출현이 그것이다.
수백만명의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아 똑같은 옷을 입고 한가지 구호를 외치는 일은 어느새 이번 월드컵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이런 광경을 흔히 4천7백만 국민 모두가 한국팀의 응원단이었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수백만명의 인원이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아니라 경기가 끝난후 응원단이 보여준 수준높은 행동은 역대 어느 대회, 어느 국가, 어느 국민들도 보여주지 못했었기에 목격한 이들에겐 충격으로까지 남게 됐다.
바로 이 때문에 월드컵을 취재한 3천여명의 외국 기자들은 놀라움을 표시했고 우리 자신들도 스스로의 저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30일간의 월드컵은 이제 막을 내렸지만 우리 응원단이 보여준 기적같은 장면 하나하나는 '달라진 응원문화의 표본'으로 남아 이번 월드컵이 세계에 선사한 뜻깊은 유산이 됐다.
◆ 응원의 개념을 바꾸다 =응원의 사전적인 의미는 '경기에서 선수들을 격려한다'는 뜻이다.
이미 상대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응원의 방식은 다소 과격하고 부정적인 행동과 말을 도구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월드컵 대회와 같이 국가대항전이라는 합법적 대의명분이 있을때는 더욱 전투적이고 비생산적인 모습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기간 우리 응원단이 보여준 방법은 기존의 상식을 여지없이 깨트렸다.
대규모 군중이 한자리에 모여 집단화했음에도 자제심없는 군중심리는 보이지 않았다.
응집된 성원을 맘껏 표출했지만 위협적인 장면은 전혀 없었고, 상대방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경기장에서는 상대팀의 기를 죽이는 그 흔한 푯말 하나 등장하지 않았고 외국 응원단에 야유의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비록 경기 결과가 안좋았다 하더라도 선수들에게는 격려의 함성이 전해졌고 선전한 상대팀에는 축하의 박수가 아낌없이 보내졌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의 새로운 응원은 우리팀의 선전과 맞물려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오르는데 최대 공신으로 꼽히고 있다.
하물며 터키와 스페인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서 축구 지도자 생활을 했던 한국 대표팀 히딩크 감독마저 "당신들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서포터즈다"고 하지 않았는가.
◆ 축제와 화합의 장으로 =폴란드전만해도 50여만명이던 길거리 응원단은 미국과의 경기에서 70만명으로 불어나더니 4백만명을 거쳐 급기야 전국민의 20%에 육박하는 7백만명까지 늘어났다.
경기장 관중석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에도 기가 질릴만한데 웬만한 도시의 너른 광장마다 붉은색 셔츠로 물결치는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같은 엄청난 인파가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점과 함께, 응원과정에서 보여준 열광적인 모습과 달리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귀가하는 모습이었다.
흡사 자기집 안마당에서 성대한 잔치판을 벌인후 말끔히 정돈하는 풍경을 연상케 했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광경 뒤에 바로 우리 국민들이 응원을 어떤 자리로 인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내재된 힘찬 에너지를 아름답고 흥겹게 분출하는 모습,바로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렇다할 축제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 국민들은 나라의 잔치를 내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찾았고 또 기꺼이 즐길 줄 알게된 것이다.
탁 트인 광장과 길거리를 무대로 한판의 축제로 즐긴 응원이야말로 이번 월드컵이 우리에게 남긴 최대의 선물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형형색색의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음악과 율동을 스스럼없이 즐긴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 줬다.
정대인 기자 big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