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작 40여분전인 오후 7시46분. "붉은 악마"의 우뢰와 같은 박수가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졌다. 선수들과 거스 히딩크 감독이 환한 빛을 발하며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특유의 짙은 흑갈색 양복을 입은 히딩크는 몸을 풀고 있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골게터 비에리와 델 피에로,공격의 시발점이 되는 프란체스코 토티의 몸놀림을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노리듯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98년 레알 마드리드 시절 제자였던 크리스티안 파누치에게도 한동안 눈을 멈췄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관중석을 향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여유도 부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히딩크는 팔장을 낀 특유의 폼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그는 간혹 코치석 기둥에 몸을 기댔을 뿐 단 한번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전반 3분 만에 페널티킥을 얻었을 때도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득점에 실패하자 선수들의 용기를 북돋는 노련한 모습을 보여줬다. 김태영이 부상을 당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박수를 치며 '파이팅'을 외쳤다. 자신의 앞에서 공을 잡은 송종국에게 골문 왼쪽에 있는 설기현에게 롱패스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전반 18분의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빼앗기고 난 뒤 히딩크의 손놀림은 빨라졌다. 코치석에서 나와 하프라인 근처에서 선수들을 지휘했다. 김남일이 토티에게 맞아 쓰러졌을 때 그라운드 안으로 뛰어들어갈 태세로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전반이 끝나가도록 경기의 흐름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히딩크는 고함을 지르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너무 그라운드에 가까이 붙었다며 대기심으로부터 뒤로 물러날 것을 여러차례 제지받았다. 후반 초반 선수들의 몸놀림이 빨라지면서 히딩크의 움직임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15분 히딩크는 승부수를 띄웠다. 수비수 김태영 대신 황선홍을 투입했다. 박지성은 멀티플레이어답게 오른쪽 공격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전환됐다. 공격진을 강화한 뒤 그는 세차게 몰아붙일 것을 채근했다. 김남일이 실려나오면서 이천수가 추가됐다. 그러나 히딩크는 빠른 공격전환이 안된다며 오른손을 치켜들어 안으로 잡아채는 동작을 연신 해보였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면서 히딩크도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10분여를 남겨두고는 수비의 핵 홍명보까지 빼며 공격수 차두리를 기용했다. 그토록 열리지 않던 골문이 43분께 터졌을 때 히딩크는 두팔을 번쩍든 뒤 불끈 쥔 주먹을 세차게 흔들며 환호했다. 극적인 동점골로 경기장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팔장을 낀 특유의 자세로 되돌아왔다. 연장에 들어가기 전 히딩크는 선수들 한명 한명의 어깨를 일일이 토닥이며 필승의 의지를 북돋웠다. 선수들의 사기가 오르자 히딩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양팔을 이용하며 각종 수신호를 보냈다. 연장 후반 5분 황선홍이 결정적인 헤딩슛 찬스를 놓치자 이번 경기 중 처음으로 가장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장 26분 안정환의 골의 터지자 그는 장기인 '어퍼컷'을 연발하며 선수와 부둥켜 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히딩크는 관중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명장의 1백17분은 참으로 길고도 길었다. 대전=한은구 기자 to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