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가 네덜란드팀 감독을 계속 맡았더라면 네덜란드팀은 본선에 충분히 진출했을 겁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오랜 친구인 페드로 살라자르 휴이트 PSV아인트호벤구단 공보관은 히딩크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은 유능한 CEO(최고경영자)"라며 한국의 월드컵 첫 승리는 유능한 CEO와 재능있는 직원들간 팀워크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거스 히딩크라고 발음하자 그는 웃으며 거스(Guus)가 아니고 '후스'라고 교정해 줬다. 네덜란드어로 G는 'ㄱ'음이 아닌 'ㅎ'으로 발음된다는 설명이었다. 히딩크의 15년 지기인 그를 8일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 구단에서 만나 '인간 히딩크'에 대해 들어봤다. ◆히딩크는 인종평등주의자="96년 유럽선수권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때 에드가 다비즈 선수가 히딩크 감독이 실력없는 선수만 기용한다고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그때 히딩크는 말의 자유는 좋지만 팀워크를 저해하는 것은 용서할수 없다며 그 선수를 귀국시켰습니다." 당시 다비즈의 불평은 특정선수를 겨냥한 인종 차별적 발언이었다. 또한 스페인의 발렌시아팀을 이끌 당시 인종차별에 분노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경기 직전 관중석에 인종차별적 성향의 현수막이 걸린 것을 발견한 히딩크는 게임을 거부했다. 결국 주최측에서 이를 제거한 후에야 선수들의 출전을 명령했다. ◆혹시 머리가 어떻게 됐나="2000년 겨울 히딩크의 한국행 결정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히딩크가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그가 왜 한국엘 가느냐는 게 주변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것도 98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5-0으로 패한 한국팀 감독으로 간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괜히 축구 후진국에 갔다가 그간 쌓아온 명감독 명성에 흠이 생긴다며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휴이트 공보관은 2000년 겨울을 회상했다. "히딩크는 출국을 얼마 앞둔 어느날 친구들에게 2002월드컵 주최국이 나를 필요로 하니 가야겠다며 목표는 월드컵 첫승리를 안기는 것이라고 말했지요." 그는 당시 히딩크 감독이 그 짧은 시간에 한국팀을 그런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회고했다. ◆살아있는 아인트호벤 신화= "히딩크가 PSV를 떠난지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아인트호벤에는 아직도 그의 신화가 살아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18개 프로축구 구단중에서 PSV가 빅클럽으로 부상한 것은 순전히 히딩크의 공로였다고 말했다. 1988년 히딩크는 당시 세계 톱스타로 풍미하던 브라질 출신 호마리우를 영입,내셔널컵 우승을 이뤄냈다. 그후 PSV는 호나우두등 세계적인 선수가 거쳐가는 유럽 메이저클럽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87년 히딩크가 처음 맡았을 때만 해도 PSV구단은 대단치 않은 팀이었지요.선수들 평균 나이가 20대 후반으로 2~3년 후면 현역에서 은퇴할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인트호벤에서 조용한 은퇴를 기다리는 노장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보니 경기에 대한 의욕이나 활기가 없었다. "히딩크는 이들에게 아주 멋진 은퇴경기를 통해 오랫동안 축구팬들 뇌리에 남는 선수가 될 것을 독려하고 동기의식을 불러일으켜 줬습니다." 87~88시즌 히딩크 감독은 새로운 의지로 불타는 이들 노장 선수를 이끌고 유럽선수권과 국내 챔피언십 등 한시즌 3개 대회 석권이라는 이변을 창출했다. ◆선수로서도 괜찮았다=히딩크는 1967년 네덜란드 소도시 두틴헴의 드그라샤프트팀에서 미드필더로 선수활동을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꽤 실력있는 선수로 통했지만 국제무대에서는 큰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히딩크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휴이트 공보관은 강조했다. "드그라샤프트 구단 소속 시절 히딩크는 68~69시즌에 22골을 넣고 69∼70시즌에는 14골을 기록하는 등 최다득점을 올리기도 했지요." 그는 히딩크가 무엇보다 경기를 읽는 눈이 아주 뛰어난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아인트호벤(네덜란드)=강혜구 특파원 bellissim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