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지는 골과 열광,세계는 흥분의 도가니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은 이변을 연출했다. 그건 월드컵의 흥미를 배가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국경일을 선포한 세네갈과 다급해진 프랑스,이런 명암은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일이면 한국은 폴란드와 운명의 첫 경기를 벌인다. 16강 진입의 열쇠가 이 경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국민들의 기대는 자못 크다. 우리 선수들의 각오는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6·25 직후 1954년 제5회 스위스 월드컵대회에 처음 출전한 한국은 헝가리에 9-0,터키에 7-0으로 참패를 당했다. 그후 86년 13회 멕시코대회부터 98년 16회 프랑스대회까지 4회 연속 출전했으나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세계 축구의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 벽을 허물고자 그 동안 많은 애를 썼지만 일이 꼬이면 감독만 바꾸는 악순환을 거듭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제 16강과 그 이상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 말을 아끼던 히딩크 감독도 그런 뜻을 내비쳤다. 결과야 두고 볼 일이지만 분명 공은 둥글다. 그 무게가 4백35g에 불과한 공 하나를 두고,골을 넣으려고 또 그걸 막으려고 하는 단순한 운동에 왜 세계가 그토록 열광하는가. 어쨌든 이미 월드컵축구는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경기가 돼버렸다. 모든 나라가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처럼 이기려고 뛰고 또 뛴다. 세계축구는 엄청난 수준에 올라와 있다. 선수들의 기량은 크게 높아졌고,자로 잰 듯한 패스와 수비수들의 장벽을 빠져나가는 돌파력은 나노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구사하는 작전도 다양해졌다. 잔디의 강도와 결은 물론 잔디를 얼마나 짧게 또는 길게 깎느냐를 따진다. 축구공도 회전력과 반발력,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계속 대체되고 있다. 70년 멕시코대회 때부터 채택된 최초의 공식구인 텔스타에서 시작,98년 프랑스대회 때에는 트리콜로,이번 월드컵에는 피버노바가 등장했다. 그 공이 누구의 발에 걸려 어느 골문을 가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신만이 아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된다. 때가 때인지라 축구와 정치가 묘하게 겹치면서 엇갈린다. 축구에서는 골을 많이 넣으면 이긴다. 정치에서는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축구는 발로 하지만 신사적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 같다. 신사적이어야 하는데 험한 말이 오가고,때로는 킥복싱처럼 손과 발을 쓰고 멱살도 잡는다. 축구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지만 정치는 그렇지 못하다. 축구선수는 실력으로 평가된다. 정치인은 거짓말도 잘하고 술수도 부린다. 축구에서는 부정·불법·탈법이 용인되지 않는다.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의 불법·탈법은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축구는 정정당당히 싸우고 결과에 승복하는 페어플레이를 한다. 정치를 축구처럼 할 수는 없는가. 경제 역시 축구처럼 할 수 없는가. 경쟁에서 이기려고 계속 뛰면서 땀을 흘릴 수 없을까. 남이 뛸 때 멈칫거리면 골을 먹듯,더 뛰어야할 때 덜 뛰거나 쉬면 경쟁에서 진다. 노동시간단축 같은 게 그런 예다. 관중은 날카롭고 냉정해서 열심히 뛰지 않는 선수를 비판한다. 경제현장에서는 그런 비판은 오히려 비난을 받는다. 공정한 경쟁을 담당할 심판은 없다. 심판이 있어도 때로는 잘못 판단을 한다. 항의가 거세면 그 항의는 통한다. "세계 1위와 싸워도 두렵지 않다." 히딩크 감독의 말이다. 열심히 준비했다는 뜻일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심사이리라.세계 각국과 경쟁하려면 경영자나 근로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일류가 돼야 한다. 남이 쉴 때 뛰고,남이 뛸 때 더 빨리 뛰어야 소득격차 기술격차를 좁힐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승리를 기대해 보자.평가전처럼 지고서도 만족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실력 이상을 기대하는 건 과욕이다. 지금 우리는 축구에 열광하고 있지만,진정 축구를 사랑하는가를 한번 냉정히 따져보자.월드컵 분위기에 휩싸여 흥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길 때 환호하는 거야 누군들 못하랴.축구를 사랑한다면 졌을 때에도 격려와 애정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길 준비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yood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