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2001년은 유난히 힘겨웠던 한 해였다. 천문학적 숫자의 불량채권 망령은 일본 정부와 금융계를 잠시도 그냥 놓아두지 않은 채 괴롭히며 대공황의 잠재적 진원지라는 오명을 안겼다. 성장 엔진 역할을 떠맡아 온 제조업은 후발 경쟁국들의 추격에 밀리면서 ''세계의 공장'' 일본을 무기력한 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국가 위상의 몰락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정부 관료와 이코노미스트들은 저마다 "일본, 이래 가지고는 안된다"며 큰 목소리로 재팬 리바이벌 처방을 앞다퉈 들이대고 있다. 이들이 꼽는 일본 회생의 첫째 열쇠는 곪아터진 금융부문의 대수술이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제조업, 고용에 불어닥친 맞바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부활의 조건이 될 것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일본 경제는 내부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뒷걸음질을 멈추고 과연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지 하타케야마 노보루 일본무역진흥회(JETRO) 이사장(66)의 견해를 들어 보았다. [ 대담 = 양승득 도쿄 특파원 ] ----------------------------------------------------------------- -일본 제조업이 기업들의 잇단 해외 이전과 후발 경쟁국들의 추격에 휘말려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아예 미래가 없다는 회의적 의견도 적지 않고요. "일본 제조업이 위기를 맞았다지만 산업화의 과정에 비춰 본다면 현재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산업도 고도화되고 저부가가치에서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구조도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순 저부가가치 업종이 일본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임금이 싸고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일본은 중국에 비해 임금이 20배 이상 비싼데 이런 조건에서 동일한 업종끼리 대등하게 경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입니다. 따지고 보면 일본의 고물가도 제조업 공동화를 부추기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물가가 기업들의 해외 이전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2000년으로 기억됩니다만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자체 조사에서도 일본의 물가는 미국에 비해 60%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물가가 비싸니 생활이 힘들고, 살림을 꾸려가자니 임금을 이에 맞게 받아야 되고…. 이런 것들이 결국 제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설비 이전을 재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물가는 고임금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생산코스트 상승으로 직결된 탓에 일본 제조업이 일본 땅에서 기계를 돌릴 수 없게 된 겁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금융계 일각에서는 경기 회복을 위해 물가상승을 유도해야 한다는 인플레 정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주장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입장입니다. 디플레로 물가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의견들이 많다지만 왜 무엇 때문에 일부러 인플레를 자극하려 합니까. 일본의 물가는 아직 세계 최고입니다. 물가가 비싸니 고비용, 저효율구조를 벗지 못해 외국자본이 일본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겁니다. 인건비뿐 아니라 수송비, 전력, 교통비 등 어느 하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일본이 GDP(국내총생산)에서는 세계 2위라지만 일본이 유치한 외국자본은 액수로 볼 때 22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가를 끌어내리는 것이 오히려 일본 경제를 살리는 길입니다. 일본의 고물가를 환율정책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기에는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엔화약세로 일본 국민들의 개인금융자산(약 1천4백조엔)이 결과적으로 오그라든다면 소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만만치 않을게 분명합니다" -고비용 체질의 일본 경제가 지금과 같은 불황을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현재와 같은 물가 하락추세를 인위적으로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는 겁니다. 그리고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완화도 필수 조건입니다. 일본의 물가는 중국산등 값싼 외국산 제품 수입증가와 유통구조 개선에 힘입어 앞으로 더 떨어질 것입니다. 일본과 외국과의 가격차도 갈수록 좁혀지겠지요. 물가가 떨어지면 생활이 윤택해지고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 코스트가 내려갑니다. 생산 코스트가 낮아지니 일본에서 기업하려는 외국 자본은 늘어날 것이고 자연 고용기회도 확대됩니다. 싼 임금을 찾아 일본을 벗어났던 일본 기업들의 해외 이전 행렬도 줄어들게 분명합니다. 조세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공공 사업에 쏟아부을 돈이 적어지니 정부로서도 재정 건전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의 고용 문제를 외자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갖고 계신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본의 실업률은 2001년 11월 현재 5.5%로 사상 최고입니다. 완전실업자수는 3백60만여명으로 추정됩니다. 기업들의 감?바람과 불황이 실업 증가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만 외국자본 유입확대로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도 외국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긴 합니다만 외자 유치를 어느 정도 고용확대로 연결시키려 하는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외국계 기업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은 5.4%까지 올라가 있는데 반해 일본은 0.7%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만큼 외국 자본이 앞으로 일본의 고용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중국의 저력에 대한 경계, 우려가 일본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만 경제적 측면에서 본 중국의 국제 경쟁력을 몇 점 정도 주시겠습니까. "점수로 간단히 환산해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눈부신 하이테크화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비교 잣대는 한 가지 들 수 있습니다. 1990년만 해도 중국의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기계공업 제품의 비중은 9%였습니다만 이것이 2000년에는 35%로 급상승했습니다. 90년의 경우 인도는 기계공업 제품 수출비중이 11%로 중국보다 높았습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인도는 2%포인트 상승에 그쳤습니다. (투자, 통상정보의 조사, 수집 및 분석에서 일본 최고수준을 달리는 것으로 알려진 일본무역진흥회는 중국의 산업과 주요제품의 품질 수준에 대한 평가를 내린 책을 지난해 말 발간, 서점가의 주목을 끌었다)" -중국산 파와 생표고 버섯에 대해 일본이 산업피해를 이유로 작년 4월 세이프 가드(긴급수입제한) 잠정조치를 발동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반론적으로 말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이프 가드는 지나친 산업피해를 막을 수 있도록 WTO(세계무역기구)가 보장한 룰입니다. 일본은 주어진 틀 안에서만 권리 행사를 한 것이고 이에 대한 대항조치는 위반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를 정확히 말한다면 무엇으로 보십니까. "솔직히 말한다면 한국 재계의 경계감을 우선 들고 싶습니다. 일본의 협력에 대한 의구심, 경계심이 한국 재계 일각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경제가 반드시 회생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계시는데. "그렇습니다. 물가가 내려가면 소비와 투자도 모두 얼어붙게 돼 개인, 기업이 다 함께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고코스트 조정 과정이 끝날 때까지 겪어야 할 아픔입니다. 그러나 고코스트 체질이 바뀌고 나면 일본 경제는 강한 힘을 다시 찾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이즈미 개혁에 대한 찬반 양론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규제 완화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불필요한 규제가 없어질수록 민간의 활력이 살아나고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세계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통상전문가 시각에서 볼 때 언제쯤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보십니까. "올해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입니다. 교역량은 줄었고 항공, 선박회사들이 지불하는 보험료는 껑충 뛰었습니다. 이는 상품가격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고 소비자들은 더 움츠리게 돼 있습니다. 빨라야 올해 후반, 아니면 내년 이후나 돼야 종전 수준을 되찾을 것으로 보입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