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바꿔야 '경제'가 산다] 1부 : (3) '빅딜'의 성적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 99년 1월 6일 오후.
LG 구조조정본부 강유식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구본무 LG 회장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온 직후였다.
현대와 LG 두 그룹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왔던 반도체 빅딜이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의 LG반도체 인수로 결론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정부는 세계 9위의 반도체 기업이 탄생해 '반도체 한국'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 빅딜이 타결되기 4일 전인 1월2일자 기사에서 '현대-LG간 반도체 부문의 빅딜은 DJ 정권의 계산착오'라고 비판했다.
두 회사가 통합하면 자금부담이 커지고 부채비율이 높아져 외자유치가 어렵기 때문에 실효성이 의문시된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지의 분석이었다.
불행히도 하이닉스는 이코노미스트의 예상대로 2년도 채 안돼 생사의 기로에 서서 경쟁사인 마이크론사와 합병논의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LG는 아직도 매각대금을 다 받지 못했는데 빅딜로 탄생한 회사는 자생력을 상실한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 초기 내걸었던 빅딜 정책의 명분은 단순했다.
주력업종 중심으로 대기업의 사업구조를 재편, 중복투자를 해소하고 규모의 경제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이었다.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대기업의 잘못된 사업 관행을 뿌리뽑겠다는 정권초기 의욕도 빅딜을 정당화하는데 한몫을 했다.
반도체뿐만이 아니다.
다른 부문의 빅딜 역시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부문이 통합돼 탄생한 빅딜 1호 기업인 '철도차량통합법인'은 현대쪽(현대모비스)으로 넘어갔다.
과당경쟁을 막고 독자경영이 가능한 지배구조로 만들겠다는 애초의 빅딜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대우 삼성 현대 등 항공3사가 통합해 설립된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수익성 악화에 허덕이며 정부의 몰아주기식 군수물량으로 버티고 있다.
삼성과 현대의 석유화학부문 통합작업은 아예 무산된 채 각자 살 길을 찾고 있다.
현대석유화학은 현재 매각을 추진 중이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무리한 목표설정, 단기간 내에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는 조급증, 강압적인 추진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게 기업인들의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의 경우 생산시스템과 경영방식이 전혀 다른 두 회사를 인위적으로 통합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며 "차라리 생산라인을 줄이도록 유도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정부 개입만으로는 과잉설비를 해소하고 해당업종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게 빅딜의 교훈이라는 지적이다.
추진방식도 문제였다.
정부는 형식상 '민간 자율'을 내세웠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업인은 많지 않다.
채권은행의 여신회수와 금융제재라는 압박수단을 동원해 '항복'을 받아냈을 것이라는게 대다수 기업인들의 '심증'이다.
더 큰 문제는 정권 출범때마다 기업들은 거창한 명분과 구호로 포장된 산업정책에 휘말린다는 점이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국가경제의 골간을 이뤄야 하는 산업정책이 단기간의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정치권의 실험대상이 되고 있다"며 경제논리가 때마다 뒷전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