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中閑談] (19) '범행 스님(법주사 조실)'.."몸은 먼지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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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방편으로 하는 참선)을 좋아하지 않아.간화선을 해서 깨쳤다고 해봐야 불법의 전통을 전해주고 받을 뿐 일반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모르는 사람에겐 선문답이 동문서답(東問西答)일뿐 아무 소용 없어" 첫마디부터 심상치 않다.
선불교를 표방해온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간화선을 일언지하에 부정하다니...중국의 육조 혜능에서 비롯돼 경허,만공,성철 등 한국의 대선사들이 한 점 의심없이 취했던 수행의 방편이 아니었던가.
지난 4일 오후 수원 화성(華城)의 남쪽문인 팔달문 인근 팔달사(八達寺) 경내에서 만난 범행 스님(梵行.80.법주사 조실)은 이렇게 간화선에 대한 비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48년 금산 태고사에서 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금오 스님(1896∼1968)과 혜암 스님(1879∼1944)의 지도를 받았던 노장(老長)이라 더욱 뜻밖이다.
"불교는 선(禪)으로 가면 아무 말도 필요 없고 임제종의 할(喝)과 같은 소리를 꽥꽥 지를 필요도 없어.문수보살과 대화하던 유마거사가 대답 대신 '양구'(良久)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참 기막힌 법문이었지"
'양구'란 '양구부대(良久不對)'의 줄임말로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뜻.말없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범행 스님은 "선문답이 원래는 기막히게 좋은 얘기지만 보통 사람은 몇 십년을 노력해도 그걸 모른다"며 "일반 대중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노장은 그래서 석가모니부처가 수행했던 여래선,묵조선을 방편으로 삼아 존재의 실상을 찾는다고 했다.
화두로써 의심을 풀어가는 간화선과 달리 묵조선은 화두를 갖지 않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좌선하는 것.여래선은 부처의 수행법으로 달마대사가 전한 최상의 선을 이른다.
그러나 간화선이나 조사선을 옹호하는 측에선 여래선은 여래의 교설(敎說)에 의거해 깨닫는 선이며 문자의 알음알이에 떨어져 달마가 전한 진짜 선미(禪味)에 이르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다.
"나는 법문할 때 (참선에 들기 전에) 화엄경까지는 보라고 해.사교입선(捨敎入禪·교를 버리고 선에 듦)이라지만 버릴 교(敎)가 있어야 버릴 것 아니야.교,즉 부처님의 말씀은 도에 이르는 길이야.길을 모르고서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하겠어"
그렇다면 조사선으로는 안된다는 것일까.
범행 스님은 "자성(自性)은 번뇌가 끊어지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참으로 깨친 분이라면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가 통한다"고 강조했다.
부처와 보살이 갖는 여섯가지 신통력인 육신통(六神通)의 마지막 단계인 누진통(漏盡通·번뇌를 끊는 지혜를 체특한 신통력)까지 갖춰야 성불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육신통 중에 타심통(他心通)이라는 게 있어.남의 마음상태를 아는 능력이지.아주 깨친 분이라면 누가 뭐하러 자기를 찾아왔는지 이 타심통으로 안단 말이야.부처님은 물어보지 않고도 누가 왜 찾아왔는지 다 알고 처방했거든.그런데 낮은 단계인 타심통도 못하면서 깨쳤다고 할 수 있겠어"
참 신랄한 비판이다.
일제 때 경기도 화성의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노장은 젊은 시절을 화려하게 보냈다.
양조장 정미소 양복점 화학공장 등 여러가지 사업도 해봤고 인물도 훤해서 한국 여자는 물론 일본 여자들까지 시집오려고 줄을 섰다는 것.그러나 노장은 여색이나 술 담배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어도 책은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다.
"28세 때 화학공장 폭발사고로 폐를 상해서 요양차 태고사에 갔다가 포산 스님이 가르쳐준 '관세음보살모다라니주(呪)'를 열심히 외워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그 길로 출가를 했고 나중에 금오·혜암 스님한테 갔지.두 분이 조사선을 하라고 그렇게 권하셨지만 난 안했어"
그래도 혜암 스님은 당시 범행 수좌한테 '효일(曉日)'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내렸다.
옛날 조사의 게송을 놓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법거량을 한 뒤의 일이다.
조사선과 여래선도 결국은 이렇게 만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닌 것은 없어.조그만 모기나 파리에도 불성(佛性)이 있어.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 조그만 곤충들이 알낳고 새끼낳고 후손을 퍼뜨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식물도 낫이나 도끼를 들고 가면 벌벌 떨어.눈에는 안 보이지만 전파현미경 같은 것으로 보면 보일 게야"
노장은 "몸 안의 벌레가 사자를 죽이듯 이 세상에 절대 강자란 없다"면서 "미국이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전쟁하는 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팔십 노구에도 믿음을 굽히지 않고 진지하게 설명하는 노장의 의지가 참 꼿꼿하다.
마땅치 않은 일은 법상(法床)에서조차 용납하지 않는 그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잘 살려면 자족(自足)이 최고야.다툼을 해서라도 많이 가지려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하잖아.그러니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지"
목욕탕에 가야겠다고 일어서던 노장이 툭 한마디를 더 보탰다.
"신여취말(身如聚末) 심여풍(心如風)".몸은 먼지를 뭉쳐놓은 것과 같고 마음은 바람과 같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일주문 바깥으로 나서는 노장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수원=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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