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전 10시 울산시 남구 삼산동의 롯데백화점 울산점 정문앞. 개점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 이인원 롯데쇼핑 사장, 노신영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등과 함께 건장한 체구에 호남형 얼굴의 중년 신사가 모습을 드러내 축하 테이프를 잘랐다. 신동빈(46) 롯데그룹 부회장. 그가 백화점 개점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아버지 신격호 회장의 고향(울산시 울주군 상동면 둔기리)지역 백화점 개점 행사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롯데그룹의 향후 구도와 관련, 많은 점을 시사하는 듯했다. 신 부회장은 이날도 지극히 말을 아꼈다. 인삿말은 이 사장이 맡았다.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는 한국말과 부자연스런 억양 때문이다 신 부회장은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랐다. 미국 콜롬비아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MBA)를 딸 때와 노무라증권 런던지사에 다닐 때를 빼고는 일본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일본과 한국을 일정한 주기로 오간다. 가족도 일본에 있다. 그에게 있어 일본은 시작이며 밑바탕이다. 그런 그가 지난 97년 그룹 부회장으로 선임돼 한국 롯데를 총괄하면서부터 달라지고 있다. 한국사업과 한국말에 매달리고 있다. 올 2월부터는 전경련 부회장직을 맡을 정도가 됐다. 전경련 산하 유통산업위원회 위원장직도 맡았다. 내면까지 한국 기업인으로의 변신이 시작된 셈이다. 그의 인생에 있어 아버지 신 회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인생관과 경영철학에도 아버지의 생각이 진하게 묻어난다. 단적인 사례가 바로 '거화취실(去華就實)'의 정신. 화려하게 포장하는 것을 멀리하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신 회장이 집무실에 걸어놓고 롯데의 정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경영철학이다. 신 부회장은 사업에 관한 질문이 나오면 으레 "롯데는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사업만 할 겁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조목조목 예를 든다. "우선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에 현금지급기를 설치해 금융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는 패스트푸드점인 롯데리아에서도 이런 서비스를 할 겁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인터넷 쇼핑몰인 롯데닷컴에서 물건을 사고 세븐일레븐에서 물건을 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죠" 소매업과 금융업을 결합하거나 연계한 사업모델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대신 유통 금융 레저 등 서비스 산업과 관련 없는 신규사업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신 부회장이 존경하는 기업인 1순위에 소니 창업자인 모리타 회장(작고)을 주저없이 꼽는 것도 '한 우물 경영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전자산업에 대한 외길 경영으로 세계 최고의 전자기업을 일구었다는 생각에서다. 만약 소니가 수익성 있는 사업 여기저기에 손대는 탐욕스러운 행동을 했다면 국민들에게 부담만 줬을 것이란게 그의 지론이다. 지난 97년 IMF사태 때 문어발 경영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느냐고 강조한다. 그는 지난 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한국 롯데에 간여하기 시작해 그룹 기조실 부사장, 비서실 부사장, 그룹 부회장 등을 거치며 착실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편의점과 닷컴 기업은 아예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런 그에게 쏠리는 시선이 최근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후계구도의 밑그림이 어떻게 그려질지에 대한 안팎의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아직 명확한 증거가 포착되진 않았지만 대권이 신 부회장으로 기울어지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우선 1922년생인 신 회장의 나이가 지금 여든을 바라본다. 신 회장을 이어 한국 롯데를 이끌어갈 만한 마땅한 대타도 없다. 롯데그룹에 몸담고 있는 신 회장의 핏줄로는 신 부회장을 비롯 신동인 롯데쇼핑 공동대표,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 등이 있다. 신 공동대표는 신 회장의 사촌형인 신병호 전 롯데칠성음료 고문의 장남이다. 신 회장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백부 신진걸씨의 직계다. 신 공동대표는 회장을 보좌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신 부사장은 요절한 첫 부인 노순화씨와 사이에 낳은 유일한 혈육이지만 한국 롯데를 맡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게 일반적 관측이다. 신 부회장의 형인 동주씨는 최근 일본 롯데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에게 갑자기 신 회장이 한국 롯데를 맡길 가능성도 적다는게 측근들의 얘기다. 신 부회장이 활발한 신규 투자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도 미래의 구도를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지난 99년 편의점체인 코리아세븐 대표이사를 맡은지 얼마 안돼 국내 1위 업체로 키워냈다. 코오롱이 운영하던 로손 점포 2백40여개를 일거에 인수, 일약 선두로 올라선 것이다. 롯데닷컴 대표이사도 맡아 온라인 사업과오프라인 사업의 시너지를 뿜어내는 기관사 역할도 자임했다. 이같은 사업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내부에서도 미묘한 공기가 감지되고 있다. 계열사 사장들이 언론 접촉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이는 신 부회장 외에 다른 최고 경영자가 언론에 노출될 경우 신 부회장의 총수 이미지 만들기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실제 홍보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력기업인 롯데쇼핑 홍보조직의 임원, 부장 등 핵심 요원들을 그룹홍보 지원을 위해 그룹 문화홍보실로 발령냈다. 재벌 2세라는 녹록지 않은 운명을 타고난 신 부회장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개인적 소망은 발레를 전공하는 딸이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란다. 독주를 삼가는 대신 부드러운 와인을 선호하는 편이다. 대신 운동은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핸디 20 수준인 골프도 즐기는 운동중 하나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 [ 약력 ] 생년월일 : 55년 2월14일 출신학교 : 일본 아오야마대, 미국 콜롬비아대 경영대학원 입사연도 : 81년 노무라증권 경력 : 호남석유화학 전무(93년) 롯데그룹 기조실 부사장(95년) 롯데그룹 부회장(97년) 코리아세븐 대표이사 부회장(99년) 롯데닷컴 대표이사 부회장(2000년) 가족관계 : 오고 마나미씨와 1남2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