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01:07
수정2006.04.02 01:10
"주는 기쁨은 보살 복이요 받는 기쁨은 거러지("거지"의 경상도 사투리)복이라"
부산 연산동 혜원정사에서 지난주말 만난 고산(67.하동 쌍계사 조실)스님은 "언제나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뜻을 지닌 화엄경의 한 구절을 들려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고산 스님은 제방선원을 거친 뒤 당대 최고의 강사였던 고봉 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아 선교일여(禪 一如)의 경지를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99년말 조계종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지난 75년 자신이 창건한 혜원정사와 쌍계사,통영 앞바다의 연화도 연화사,부천 석왕사를 오가며 불법을 전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내놓고 오신 지 2년이 다돼가는군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매일 바빠요.
찾아오는 스님이나 신도들도 맞아야 하고 전국에서 법회요청도 많습니다.
총무원장직을 내놓고 오니 세상 편합니다"
-스님은 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풀면 마음이 즐겁기 때문이지요.
자(慈)는 사랑하는 것,비(悲)는 중생을 어엿비(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 형제와 인류는 물론 축생 미물 초목까지도 차별없이 다 사랑하고 슬퍼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입니다.
널리 사랑하고 슬퍼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괴롭히고 해치는 대상까지도 사랑하고 슬피여겨야 합니까.
"물론입니다.
조건없이 사랑해야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실 '원수'는 없어요.
삼라만상이 다 부처요,부처의 아들인데 원수가 어디 있습니까.
착하게 대하면 언젠가 마음을 돌릴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남 생각보다는 자기 몸을 가꾸거나 큰 집,큰 차 등 물질적·외면적인 데 더 신경을 쓰지 않습니까.
"모두들 나를 높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죠.
정치인은 명예욕에 이성을 잃었고,대중들은 모두 남녀간의 사랑과 돈에 이성을 잃고 있습니다.
제정신 가진 사람은 1백명중 30명밖에 안돼요.
본성과 직심(直心·정직한 마음),양심대로 살도록 종교인들이 앞장서야지요"
-스님께선 선교일여의 경지를 이루신 것으로,또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던 때를 좀 설명해주시죠.
"입산후 10년 가량은 '이뭣고(是甚)'를 화두로 참선에만 매달렸지요.
길을 걷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든 뭘 하더라도 이 화두를 놓지 않았지요.
그러나 뚜렷한 경지를 보지 못해 당대 제일의 강사였던 고봉(高峰:1901∼1969) 스님을 만나 15년간 강원생활을 하며 경전에 눈을 떴지요"
고산 스님은 김천 청암사에서 경학과 참선을 병행하던 67년쯤 처음 깨달음의 경계를 봤다.
참선을 하고 있는데 앞이 환해지면서 삼천대천 세계가 다 보이더라는 것.
그때 읊은 오도송(悟道誦)이 '견문여허공(見聞如虛空·보고 들음이 허공과 같고) 각지담여수(覺知湛如水·깨달아 담담하기 물과 같도다) 담연허공중(湛然虛空中·담담하고 텅빈 가운데) 즉견본래인(卽見本來人·곧 본래인을 보았도다)'이다.
고산 스님은 그후로도 세차례나 더 이런 경지를 봤다고 했다.
-그런 경지에서 본 깨달음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물 한 잔을 마셔도 차가움과 뜨거움을 스스로 알뿐 말로 해선 모르지요.
돌로 만든 배를 타고 가고 돌장승이 눈물을 흘리는 그 자리를 가봐야 알지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가섭존자의 미소를 보고 정법안장을 전한 것처럼 교리밖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것이 격외선(格外禪)의 도리인 것입니다"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고통이란 생각에 달린 것입니다.
변소간의 구더기도 중생이 볼땐 더럽지만 자기들끼리는 더없이 즐겁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들이 쾌락과 욕심 속에 사는 이 세상도 제불보살이 보기엔 똥물보다 더 더러운 곳이지요.
욕심을 없애면 자비인욕이 생겨나 도(道)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행복은 언제나 열심히 사는 사람의 몫입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노력이 필요하지요.
게으른 자에게 행복은 언제나 꿈으로 남을 뿐이지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오늘 쓴 건데 가져가라"며 붓글씨를 내놓았다.
'자실인의(慈室忍衣·자비를 집으로,인욕을 옷으로 삼으라)''자비무적(慈悲無敵·자비에는 적이 없다)'일인장락(一忍長樂·한번 참으면 길이 낙이 된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조실당을 나오는데 다시 부르더니 "더운데 이것도 가져가라"라며 커다란 한지부채를 내밀었다.
부채엔 이렇게 씌여 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
고산 스님은 산아래 중생들에게 이렇게 경책한다.
자비를 베풀라,인욕하라,그리고 부지런하라.
부산=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