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은 폴란드 국영자동차 회사(FSO) 인수 협상을 5년이나 끌었다. 폴란드 사람들이 "FSO의 자살"이라고 부른 바로 그 "파비우스 전략"(지구전)이었다. GM은 언제든 이런 방법으로 상대방의 숨통을 서서히 끊어갔다. 의도적이었던 아니든 GM은 그랬다. 이제 대우가 걸려들 차례였다. GM은 실사와 협상,다시 정밀실사를 되풀이하는 지연전술로 압박해왔다. 불행히도 대우에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김우중 회장은 패퇴했지만 GM의 지구전은 지금도 대우차 협상을 벼량 끝으로 몰아고 있고 우리의 당국자들은 여전히 전후맥락을 모른 채 헛발질만 하고 있다. "이게 말이 돼?" 97년 11월 16일.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본관 3층 대회의실. 김우중 회장의 고함소리가 밖으로까지 터져나왔다. "도대체 사업을 어떻게 하고 있길래 이 모양이야.아무리 상황이 안좋아도 그렇지.기아가 부도까지 났는데도 40%도 안된다니 말이 돼?" 대우자동차 임원들은 고개를 떨군채 회의자료만 쳐다볼 뿐이었다. "한꺼번에 신차를 세가지나 내놓고도 안되냐 말이야.해외부문은 또 왜 이래.공장 가동률이 30% 밖에 안되잖아.당신들이 갖고 있는 대책이 뭐야" 김 회장에게 있어 97년은 실로 야심찬 한 해였다. 세계경영을 위한 3년여의 공략전이 일단락됐고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3개 차종을 동시에 출시했다. 그러나 실망은 기대치의 함수이기도 했다. 국내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33%대에 머물렀고 신흥시장은 더욱 비참했다. 가동률은 폴란드만 60%를 유지했을 뿐 우즈베키스탄 44%,루마니아 24%,인도는 11%였다. "중역들은 모두 해외로 보낼테니 각오들 하세요"라며 김회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박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지 일주일 되던 97년 12월 8일.대우는 쌍용자동차를 인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러나 실사가 진행되면서 "뭔가 문제가 있다"는 급보가 연이어 올라왔다. 일부 직원들은 인수포기를 주장하기도 했다. 실사에 참여했던 A씨는 "부실이 생각보다 심해 정상화에는 수천억원의 비용이 더들어가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산가치는 겨우 1조5천억원밖에 되지 않았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재협상을 통해 추가로 부채 3천억원을 쌍용에 더 넘기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쌍용차는 그러나 98년 한 해만도 피같은 자금을 6천억원이나 집어 삼켰다. 그것은 독이 든 사과였다. 전직 대우차 사장 B씨는 그러나 "대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기업을 더키워 정상궤도에 올려놓던가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던가 둘중의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어차피 죽을 바엔 확대경영 쪽에서 승부수를 띄운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고육의 책이었다. 그것은 쌍용을 인수하고 삼성,기아를 묶어 GM과 연대한다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게임 98년 2월2일 대우센터 빌딩.김우중 회장과 앨런 페리튼 GM코리아 사장은 전략적제휴를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본격적인 협상에 착수했다. 포드의 맹추격을 받고 있던 GM 입장에서도 대우가 필요했다. 당시 협상에 참가했던 대우차 임원 C씨의 증언. "GM은 지난 수년간 세계경영이 거둔 놀라운 성과를 우선 궁금하게 생각했다. 18만대였던 생산능력이 불과 6년만에 2백만대 수준까지 올라왔던 터였다. GM으로서는 대우를 통해 동구권과 중국 등에 진출할 수 있는 지름길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협상은 급류를 탔다. 두달뒤인 4월 25일 GM은 청와대를 방문,대우와의 합작방침을 설명했고 김 회장도 "6월말이면 결론이 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김 회장으로서도 GM과의 협상을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5월에는 일부 해외 공장에서 가동중단이 불가피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문제는 경영권이었다. "세계경영을 포기하라"는 것이 GM의 요구였고 김회장은 이를 거부했다. 92년 결별사태의 반복이었다. "문제는 부채입니다" 6월9일 미국을 방문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은 GM의 잭 스미스 회장과 마주 앉았다. 김 대통령은 "대우와의 협상이 빨리 성사되길 바랍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미스 회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우리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외국기업들이 투자하기에 한국기업들은 부채가 너무 많습니다. 이는 대우도 마찬가집니다" 면담은 어색하게 끝났다. 이기호 수석은 "GM이 대우 부채를 일부 탕감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역시 그것이 문제였다. 당시 협상에 참가했던 한 임원의 증언. "김 회장의 지시로 인원 재무 판매망 등 상세한 자료를 GM에 넘겨줬다. GM은 특히 자금상황에 대한 자료를 집중적으로 요구했다. 기업기밀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주는 것에 대한 내부의 문제제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협상은 예정된 "교착"으로 나아갔다. 몇달간의 실사를 통해 GM은 드디어 "대우 수수께끼"를 풀어냈다. 그것은 대우자동차라는 미니 회사가 불과 5년만에 14개나 되는 해외공장을 인수할 수 있었던 비밀이기도했다. GM은 대우 실사에서 "작은 도전자"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어냈다. GM측에서도 문제는 꼬여갔다. 6월 중순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GM근로자들의 파업이 터졌다. 전 미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이 파업은 54일이나 지속됐고 GM은 40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봤다. 악재에악재가 더하는 꼴이었다. 이제 누가 먼저 파경을 선언하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GM이 먼저였다. 7월 중순 GM은 느닷없이 기아차 입찰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물론 대우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었다. 연인의 변심치고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GM은 정작 기아입찰엔 참여하지도 않았다. 김회장은 두달이나 지난 9월10일 힐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GM과 협상은 중단됐다"고 선언했다. 인수하든지 죽이든지 GM의 생각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대우자동차 사장 B씨의 증언. "당시 GM의 전략은 확실했습니다. 대우를 인수하든지 아니면 죽이든지였습니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그처럼 질주하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던 거죠."잘게 쪼개 사업부형태로 인수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고사시킨다"는 것은 공공연한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내부의 밀고자도 문제였다. GM인수가 분명해지면서 대우차의 BOM(차종별 원가계산서:Bill of Materials)등 비밀문건이 박스채 넘어갔다. (전직 임원 증언) 해가 바뀐 99년 1월.김 회장은 다시 GM을 찾아갔다. "경영권을 내놓을 수도 있으니 다시 협상해보자"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연인의 마음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다음이었다. [ 특별취재팀 - 정규제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