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시장에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은 끝났으며 약하지만 회복 기운이 싹트고 있는 게 그 조짐이다. 메릴린치가 세계 유수의 반도체업체 주식에 대한 투자 등급을 높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모토로라나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등 일부 반도체 업체들의 상황도 호전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반도체경기 바닥론을 거론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강하다. ◇ 바닥의 조짐들 =그동안 생산 감축과 실적 악화 등 비관적인 말들만 쏟아내던 반도체 업계에서 희망적인 진단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바닥 조짐이다. 실제로 일부에서는 반도체 경기의 반전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모토로라는 지난 1일 7월중 반도체 수주량이 출하량을 웃돌았다고 밝혔다. 6월에는 반도체 BB율(수주량 ÷출하량)이 0.9였으나 7월에는 1을 약간 넘었다는 것이다. 모토로라의 프레드 슐라팩 반도체부문 사장은 이를 연내에 반도체 사업이 회복될 것임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했다. 세계 휴대폰용 칩의 3분의 2를 공급하는 TI의 칩 생산 수주도 늘어났다. TI는 지난달 휴대폰 칩 수주량이 약 10% 늘었다며 반도체 업계의 감산과 투자 축소로 공급 과잉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골드만삭스 증권의 아시아반도체연구소장 조나단 로스도 반도체 재고가 줄고 있다며 반도체 경기의 회복을 점쳤다. ◇ 감산이 바닥론의 뿌리 =바닥론에는 반도체 시장의 공급과잉 상태가 조만간 해소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최근 반도체 업체들의 감산과 감원 공장통폐합 투자축소가 급속히 이뤄지면서 바닥론에 불을 지폈다. 메릴린치가 19개 주요 반도체 및 장비업체의 주식평가 등급을 올린 것도 감산과 공장통폐합 등으로 가을쯤엔 반도체 가격이 오름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내부 전망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2개월동안 일본 NEC가 D램 생산을 절반으로 줄이고 오는 2004년에는 D램에서 손을 떼기로 하는 등 감산 바람은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대만 반도체업계는 투자비를 40% 줄였으며 TI 인텔 모토로라 인피니언 등 구미 반도체회사들도 30~50%씩 투자를 삭감했다. ◇ 바닥론의 의미와 반론 =반도체 경기 악화는 세계 IT(정보기술) 시장을 침체로 몰고간 주역이었다. 이같은 반도체 경기가 최악의 상황에서는 벗어났다는 메릴린치의 진단은 '세계 경제의 조기 회복이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론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바닥론은 특히 깊은 불황에 빠져 있는 세계 제조업이 꿈틀댈 날도 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미국 제조업 동향을 조사하는 전미구매관리자협회(NAPM)는 미 제조업 경기가 빠르면 10월부터 하락세를 멈추고 반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메릴린치의 바닥론이 일과성 해프닝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비관론자들은 지난 4월 살로먼스미스바니의 반도체 애널리스트 조나단 조셉이 바닥론을 펼쳤으나 실제 상황은 더 나빠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미국 등 세계 경제가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반도체경기 바닥론을 거론하기엔 무리라는 것이다. 이정훈 기자 lee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