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말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실.

전경련 기업경영위원회와의 오찬 간담회에 초청된 집권 민주당 이해찬 정책위원회 의장은 시민단체 등이 즉각 도입을 요구하고 있는 집단소송제에 대해 손을 내저었다.

"정부와 당은 (집단소송제 도입이) 시기상조이며 단계적으로 검토할 사항이라고 본다"는 말도 덧붙였다.

집단소송제는 부실 경영 등으로 피해를 본 주주중 일부가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할 경우 다른 주주도 같은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는 소송의 남발로 기업 경영을 위축시키는 등의 부작용이 큰 것으로 나타나 미국 등 대부분 선진국에서조차 시행을 유보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여당의 정책 책임자로서 ''무리한 도입은 없을 것''이라며 재계의 불안을 달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의장의 말은 이내 ''식언(食言)''이 되고 말았다.

일부 여당 의원들이 의원입법을 발의한데 이어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상장 및 등록법인을 대상으로 내년부터 이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한 것.

''기업의 투명 경영을 위해 집단소송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일부 운동단체의 명분을 앞세운 압력에 정부 여당이 밀린 꼴이 되고 말았다.

정부 여당이 압력집단에 휘둘려 경제논리를 저버린 기업 정책을 내놓은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부와 여당은 여성 취업자의 유급 출산휴가를 현행 60일에서 90일로 늘리도록 하는 등의 ''모성보호법''과 관련, 기업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되레 여성 채용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며 유보적 입장을 보였었다.

한때 시행을 2년 유예한다는 방침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관련 단체들의 압력에 정부 여당의 방침은 ''올 하반기 시행''으로 돌변했다.

사외이사로 활동할 전문인력이 충분히 형성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외이사 제도를 강행하고 최근 관련 규제를 더욱 강화한 것 역시 기업 정책이 여론몰이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정부가 올해부터 자산 2조원 이상인 대기업들에 대해 사외이사 수를 2분의 1 이상 선임토록 의무화한 뒤 기업들엔 일대 소동이 빚어졌다.

마땅한 사외이사를 찾지 못한 상당수 기업들은 아예 이사회 정원을 줄이는 편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로 인해 이사회의 기능이 자칫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렇듯 여론에 휘둘려 수시로 표변하는 정책은 기업들로 하여금 장기 안정적인 경영계획 수립을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국민 정서''에 내몰린 설익은 기업 규제가 실물 경제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음을 강력 경고하고 있다.

부채비율 2백% 축소시한 설정 등 경직된 가이드 라인으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무리한 자산 매각과 대량 유상증자를 단행했던 것이 대표적 예다.

이로 인해 우량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으로 줄줄이 팔려나갔고 지난 97년 3조4천억원에 불과했던 기업 증자규모가 99년 41조원으로 아홉 배나 늘어나면서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고려대 안동현 교수(경영학)는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과 경직된 운영 탓에 글로벌 경쟁을 벌여야 하는 기업들의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 문제"라며 "여론몰이식 압력을 극복하고 정치 논리를 배제한 기업 정책으로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시장경제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