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남자가 있다.

잘나가는 로펌의 변호사.

정의감으로 넘치는 그는 돈안되는 국선변호를 자처하는 의로운 청년이며,억울한 사람을 위해 발로 뛰라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운동화를 고수하는 심지굳은 젊은이다.

사형을 앞둔 피고인 변호때문에 해외연수라는 중차대한 기회마저 포기하는 책임감의 소유자며,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있기 위해 회사를 제끼고 휴대전화를 던져버리는 낭만파다.

그 뿐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직업적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열정파.

아,정말 그런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자 사형수와 변호사의 사랑을 그린 멜로드라마 "인디안 썸머"(감독 노효정.제작 싸이더스)는 머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인물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미연)과 그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변호사(박신양)의 애절한 사랑.

극중에서 현실감각을 키우라고 핀잔받던 주인공 변호사만큼이나 영화는 계산적이고 냉정한 "현실"을 멀리한다.

현실에서 보기 드문 순수한 인물과,절대적인 사랑을 통해 "잃어버린 순수"나 "잃어버린 낭만"을 구한다.

극작론에서 "개연성없는 가능"보다 단계가 위인 "개연성있는 불가능"을 추구하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야기의 "불가능성"을 잊게할 만큼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초반 법정공방은 꽤 긴장감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과연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했는지,여인은 왜 변호를 거부하는지.

사건의 진상에 대한 궁금증을 높이는데 성공한 영화는 그러나 감정의 소통이 상당부분 생략된 로맨스로 의아함을 안긴다.

주인공들에게 "이상기후처럼 찾아온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기엔 그에 대한 단서들이 너무나 적다.

둘사이에 사랑이 싹튼 순간이나 사랑이 자라나는 것을 인지하기 어렵다.

"살고 싶게 만들지 말라"며 마음문을 닫아걸었던 여자가 마음을 여는가 하다가 결국 사랑과 삶을 포기하는 이유도 아리송하다.

여자에게 가해진 남편의 폭력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으로 확장될 수 있겠지만 그 뿌리는 약해 보인다.

박신양은 한국 남자배우 가운데 누구보다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배우다.

연기에 물이 올랐다고 칭송받는 이미연은 무표정한 속에서도 풍부한 감정을 담아낸다.

장용도 인정많은 사무장을 무난하게 연기했다.

"인디언 썸머"란 늦가을 문득 찾아오는 짧은 여름날.

하지만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주인공들의 찬란한 사랑의 한때를 관객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사회후 "편지""약속"의 후속편 같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멜로장르의 상투성이나 관습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의미일 터다.

"영원한 제국""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시나리오를 썼던 노효정씨의 감독 데뷔작.

"약속"의 타이틀곡 "굿바이"로 인기얻은 스웨덴 팝가수 제시카가 주제가(Lost Without Your Love)를 불렀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