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뛰는 '한국인'] 김근희 <신주쿠 식품점 '한국광장'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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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전체에서 하루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도쿄의 신주쿠역을 중심으로 반경 3-4킬로미터 일대의 지역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무엇보다 도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말이 예사로 들린다.
어린이와 젊은 유학생에서 중년의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을 수없이 마주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약 10만명에 달하는 도쿄 거주 한국인중 40%인 4만여명이 신주쿠구에 살고 있다는 것이 구청측 설명이니 코리안 파워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의 특징은 그러나 한국인 거주자 수가 많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사카등 칸사이 지역의 한인 사회가 일본 땅에 수십년 전부터 뿌리 박고 살아온 재일 교포 중심으로 형성된 것과 달리 이곳은 거의 80년대 이후에 건너온 한국인들이 이끌고 있다.
신주쿠의 한국인들은 체류 목적도 천차만별이고 살아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신주쿠에서도 한국인 최대 밀집 지역인 쇼쿠안도리와 신오쿠보역 일대는 한국인들의 흔적과 숨결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다.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고 철길에 뛰어 들었다 지난 1월 말 숨진 고이수현씨의 아르바이트 일터도 이 근처에 있었다.
한국적 색채가 강해진 때문인지 한국에 거부감을 갖는 일본인들 중에서는 이 일대가 변질됐다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코리안 파워가 이곳에 일본 속의 또 다른 한국 사회를 건설해 놓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일본인들은 별로 없다.
그만큼 한국적 분위기가 강해졌고 먹거리와 음악에서 최신 유행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변하는 곳이 됐다는 이야기다.
신주쿠 구청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국광장의 이름은 이 일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중 하나다.
슈퍼마켓 같은 스타일로 각종 먹거리를 취급하는 이곳은 한국인들에게 없어서 안될 필수 쇼핑장소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 뿐만 아니다.
한국 식문화에 반한 일본인과 제3국인들에게 한국광장은 한국 냄새를 흠뻑 맡으며 마른 목을 적실 수 있게 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한국광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슈퍼마켓이나 먹거리 쇼핑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김근희 사장(47)의 살아온 경력과 한국광장의 한인사회내 역할이 상업적 의미를 뛰어넘고 있어서다.
전남 목포 출생의 김사장은 교회사를 공부한 신학도였다.
중,고교 시절부터 철학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던 그는 그리스도 신학대학을 거쳐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신학대학을 택한 것은 서양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신학을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종교적 분위기와 배경은 그가 일본 땅에 발을 딛게 된 동기로 작용했다.
그는 북한 교과서에 비친 종교관을 연구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자료를 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85년 4월 처음으로 일본을 찾았다.
일본어 학교를 다니는 한편 부지런히 책방과 도서관을 뒤졌다.
5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간 그는 86년 9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왔다.
통산성(현 경제산업성)외곽단체에서 일하면서 일본 사회 경험을 쌓은 그는 90년 히토쓰바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회사를 공부하면서 93년 "일본의 한국지배정책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를 받았다.
나이 마흔이 다 돼도록 장사와는 담을 쌓고 학문의 세계에서만 책과 씨름하는 인생을 살아 온 것이다.
김사장이 사업가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은 93년 3월 1일 도쿄 닛포리역 앞에서 "장터"라는 간판으로 미니 식품점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그가 광주의 집판 돈을 털어 넣은 점포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는 한국 먹거리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었다.
대다수 일본인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마늘 냄새가 난다며 김치에 얼굴을 찡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했다.
일본인에게도 분명 한국 먹거리를 좋아할 구석이 있다고 믿었다.
"서로 다른 민족이 가까워질수 있는 지름길은 네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활문화,언어,놀이,그리고 정보입니다"
그는 이같은 소신의 근거로 중국을 가보지도 않은 어린이들이 자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국에 우호적 감정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는 음식등 생활문화에서 접점을 찾으면 이질적 민족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일 양국 국민들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식품 판매업을 택했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전력투구하자 사업은 순조롭게 풀려갔다.
94년 쇼쿠안도리에 점포 하나를 더 낸 김사장은 98년 지금의 자리로 점포를 대폭 확장 이전해 왔다.
작년 한햇동안 18억5천만엔의 매출을 올린 한국광장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운영하는 식품판매점으로는 신주쿠뿐 아니라 도쿄 지역에서도 최대급 규모다.
1층 1백50평,3층 1백80평의 공간이 상품과 종업원,고객들로 빈틈이 거의 없다.
아르바이트 종업원 수만도 50명을 넘는다.
영업전략도 특이하다.
서울과 도쿄의 식탁에서 시간차를 없앤다는 것이 목표다.
사업 취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일 양국인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는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어디서나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상품을 갖춘다는게 기본 방침이다.
김사장은 작년 10월 3일 개천절에 한국광장 맞은 편에 대형 한식집을 "고려"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음식은 민족을 이어주는 가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광장과 고려는 한국 음식문화의 발신지이자 신주쿠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구심점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쿄의 한국인들은 쇼쿠안도리 일대 상가 발전과 한인사회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한국광장이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는 점에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소극장,태권도 도장,무용학원,도서관등을 이 일대에 세우는 것이다.
"쇼쿠안도리 지명과 한국적 분위기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이곳만 오면 한국,한국문화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다 있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할 것입니다"
한국광장과 그 주변을 한국 생활문화의 체험현장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각오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
무엇보다 도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말이 예사로 들린다.
어린이와 젊은 유학생에서 중년의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을 수없이 마주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약 10만명에 달하는 도쿄 거주 한국인중 40%인 4만여명이 신주쿠구에 살고 있다는 것이 구청측 설명이니 코리안 파워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의 특징은 그러나 한국인 거주자 수가 많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사카등 칸사이 지역의 한인 사회가 일본 땅에 수십년 전부터 뿌리 박고 살아온 재일 교포 중심으로 형성된 것과 달리 이곳은 거의 80년대 이후에 건너온 한국인들이 이끌고 있다.
신주쿠의 한국인들은 체류 목적도 천차만별이고 살아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신주쿠에서도 한국인 최대 밀집 지역인 쇼쿠안도리와 신오쿠보역 일대는 한국인들의 흔적과 숨결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다.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고 철길에 뛰어 들었다 지난 1월 말 숨진 고이수현씨의 아르바이트 일터도 이 근처에 있었다.
한국적 색채가 강해진 때문인지 한국에 거부감을 갖는 일본인들 중에서는 이 일대가 변질됐다며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코리안 파워가 이곳에 일본 속의 또 다른 한국 사회를 건설해 놓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일본인들은 별로 없다.
그만큼 한국적 분위기가 강해졌고 먹거리와 음악에서 최신 유행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변하는 곳이 됐다는 이야기다.
신주쿠 구청에서 5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국광장의 이름은 이 일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중 하나다.
슈퍼마켓 같은 스타일로 각종 먹거리를 취급하는 이곳은 한국인들에게 없어서 안될 필수 쇼핑장소로 손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 뿐만 아니다.
한국 식문화에 반한 일본인과 제3국인들에게 한국광장은 한국 냄새를 흠뻑 맡으며 마른 목을 적실 수 있게 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한국광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슈퍼마켓이나 먹거리 쇼핑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김근희 사장(47)의 살아온 경력과 한국광장의 한인사회내 역할이 상업적 의미를 뛰어넘고 있어서다.
전남 목포 출생의 김사장은 교회사를 공부한 신학도였다.
중,고교 시절부터 철학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던 그는 그리스도 신학대학을 거쳐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신학대학을 택한 것은 서양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신학을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에서였다.
종교적 분위기와 배경은 그가 일본 땅에 발을 딛게 된 동기로 작용했다.
그는 북한 교과서에 비친 종교관을 연구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자료를 구하기도 어려웠거니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 85년 4월 처음으로 일본을 찾았다.
일본어 학교를 다니는 한편 부지런히 책방과 도서관을 뒤졌다.
5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간 그는 86년 9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왔다.
통산성(현 경제산업성)외곽단체에서 일하면서 일본 사회 경험을 쌓은 그는 90년 히토쓰바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사회사를 공부하면서 93년 "일본의 한국지배정책사"에 관한 연구로 석사를 받았다.
나이 마흔이 다 돼도록 장사와는 담을 쌓고 학문의 세계에서만 책과 씨름하는 인생을 살아 온 것이다.
김사장이 사업가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은 93년 3월 1일 도쿄 닛포리역 앞에서 "장터"라는 간판으로 미니 식품점을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그가 광주의 집판 돈을 털어 넣은 점포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는 한국 먹거리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었다.
대다수 일본인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마늘 냄새가 난다며 김치에 얼굴을 찡그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했다.
일본인에게도 분명 한국 먹거리를 좋아할 구석이 있다고 믿었다.
"서로 다른 민족이 가까워질수 있는 지름길은 네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활문화,언어,놀이,그리고 정보입니다"
그는 이같은 소신의 근거로 중국을 가보지도 않은 어린이들이 자장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국에 우호적 감정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는 음식등 생활문화에서 접점을 찾으면 이질적 민족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일 양국 국민들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식품 판매업을 택했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전력투구하자 사업은 순조롭게 풀려갔다.
94년 쇼쿠안도리에 점포 하나를 더 낸 김사장은 98년 지금의 자리로 점포를 대폭 확장 이전해 왔다.
작년 한햇동안 18억5천만엔의 매출을 올린 한국광장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운영하는 식품판매점으로는 신주쿠뿐 아니라 도쿄 지역에서도 최대급 규모다.
1층 1백50평,3층 1백80평의 공간이 상품과 종업원,고객들로 빈틈이 거의 없다.
아르바이트 종업원 수만도 50명을 넘는다.
영업전략도 특이하다.
서울과 도쿄의 식탁에서 시간차를 없앤다는 것이 목표다.
사업 취지가 그랬던 것처럼 한,일 양국인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는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어디서나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상품을 갖춘다는게 기본 방침이다.
김사장은 작년 10월 3일 개천절에 한국광장 맞은 편에 대형 한식집을 "고려"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음식은 민족을 이어주는 가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광장과 고려는 한국 음식문화의 발신지이자 신주쿠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구심점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쿄의 한국인들은 쇼쿠안도리 일대 상가 발전과 한인사회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한국광장이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는 점에 상당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소극장,태권도 도장,무용학원,도서관등을 이 일대에 세우는 것이다.
"쇼쿠안도리 지명과 한국적 분위기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인상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렇지만 이곳만 오면 한국,한국문화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다 있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할 것입니다"
한국광장과 그 주변을 한국 생활문화의 체험현장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각오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