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야마가타 신칸센을 타고 북쪽으로 2시간 이상을 달려야 닿는 이와테현은 두 가지 점에서 일본 1위를 달리는 지방이다.

우선 면적과 인구밀도다.

남한의 6분의1 보다 약간 작은 1만5천2백77평방 킬로미터의 면적에 살고 있는 사람은 1백41만여명 밖에 안돼 43개 현 중 가장 땅 덩어리가 넓으면서 인구밀도는 최저다.

두번째는 바위가 많다는 점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 봐도 여기 저기 바위 산이 눈에 띄고 땅을 조금만 파내려 가면 암반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명에도 "바위"가 들어 가 있을 정도니 돌과 바위가 얼마나 흔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청 소재지이자 현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모리오카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인구가 30만명도 채 못된다.

신칸센이 지나가는 교통요지라는 점만 빼놓으면 바위와 돌만 가득한 전형적 시골 분위기의 작은 도시다.

사람 수가 워낙 적다 보니 재일교포도 1천명 남짓해 한국인끼리 얼굴 마주치기도 보통 어려운게 아니다.

이곳에서 신용조합 이와테상은을 이끌고 있는 이상경(70) 이사장의 인생 스토리는 지역 연고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주위에 도움을 주고 받을 교포 한명 제대로 없는 외딴 곳 벽지에서 자신의 땀과 노력만으로 바위 같은 일본 사회에 굳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봄이었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두 형의 손에 이끌려서였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당시 14세의 상경 소년을 "일본에서 공부하라"며 부모님이 연락선에 태워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청운의 꿈을 안고 부모님 곁을 떠난 상경 소년의 앞길은 험난했다.

일본 땅에 발을 딛은지 얼마 안돼 일본은 패전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모든 물자가 태부족했던 패전국 일본에서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생존경쟁의 싸움터로 나서야 했다.

먹고 입을 것을 모두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교토에 살았던 그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장사 일선에 뛰어 들었다.

고물장수,식당 종업원,배달등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 갔다.

가시밭길 역정을 헤치고 나온 그는 그래서 지금도 일에 관한 한 부끄럼을 타지 않는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속이는 일만 아니라면 부끄러운 일이 어디 따로 있느냐는게 그의 소신이다.

20세 초반의 나이에 벌써 일본 열도를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고 다녔던 그는 1960년 모리오카에 터를 잡았다.

도쿄에서 구식 열차로 22시간이나 걸릴 만큼 외진 곳이었지만 다른 곳보다는 벌이가 조금 낫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제일 처음 한 장사는 불고기 식당이었다.

탁자 대 여섯 개가 전부인 구멍가게 수준의 식당이었지만 죽어라 매달린 덕에 차츰 돈이 모여 갔다.

밑천이 쌓이자 이번에는 파찡꼬에 투자했다.

유기장업이지만 천직으로 알고 온 정성을 쏟았다.

이와테상은을 맡게 된 것은 1985년 5월이었다.

몇명 되지 않는 재일교포들이 서로 돕고 살기 위해 1969년 설립한 이와테상은이 경영부실로 사실상 빈껍데기 처럼 변한 상태에서였다.

이와테상은의 당시 속사정은 심각했다.

수신이 모두 15억엔이었지만 한국정부가 지원한 육성기금 5억엔을 빼고 나면 일반 예금은 10억엔에 불과했다.

그나마 회수 여부가 불투명한 부실채권이 8억여엔에 달했다.

고객들이 안심하고 돈을 맡길 금융기관이 아니었다.

언제 주저 앉을지 몰라 이와테현 지방정부의 관리체제하에서 주요업무는 물론 결산도 통제를 받아야 했었다.

그는 결심했다.

민족 차별이 심한 일본 땅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용을 잃으면 끝장이니 이를 반드시 정상화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사장직을 맡은 후 그는 자신이 다른 사업체에서 벌어들이는 돈부터 먼저 이와테상은에 집어 넣었다.

파칭코에서 수금이 끝나면 그 돈을 몽땅 갖다 예금했다.

다른 고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실채권 줄이기에 발벗고 나섰다.

돈을 빌어간 교포 고객들이 제때 갚지 않으면 밤 늦게라도 집으로 찾아다녔다.

채무자들로부터는 자연 불평과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며 "교포 힘으로 이와테상은을 정상화시켜 신뢰를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자신은 무보수로 근무하고 각종 운영경비를 대폭 감축하는 한편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이와테상은을 이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애쓴 보람이 나타나면서 신용조합은 살쪄 갔다.

그가 이사장을 맡은지 10년만인 1995년 이와테현은 이와테상은을 관리체제에서 정식으로 풀어 주었다.

그는 이 때 조합원들에게 5%의 배당을 해주며 모처럼 환히 웃었다.

지방 정부의 감독하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3년 이후 만 22년만에 실시해본 배당이었다.

이와테상은의 여,수신 증가에는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반대로 불량 채권은 급속히 줄면서 자기자본비율은 15%에 육박,모리오카는 물론 이와테현 전체에서도 우량조합의 명성을 굳히게 됐다.

이와테상은 외에도 그는 사업체를 몇 개 함께 꾸려가고 있다.

파찡꼬와 함께 볼링장,부동산 회사등을 운영중이다.

14세의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난 코흘리개 소년이 자신의 땀과 노력만으로 척박한 타국 땅 시골에서 자수성가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경제적 성공만이 그가 거둔 열매의 전부가 아니라고 귀띔한다.

교포단합을 위해 음,양으로 쏟은 땀과 정성이 더 값지다고 말하고 있다.

재일민단 이와테현 지방본부의 강영만 사무국장은"이 이사장만큼 민족의식이 강한 교포 기업인도 흔치 않다"며"관혼상제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그는 언제나 남에게 도움을 주는 자리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교포 자녀들이 한국어를 모르면 안된다며 1971년부터 78년까지 자신이 버스를 구입해 직접 운전하며 학생들을 7년간 학원으로 실어 날랐을 정도다.

"제가 뭐 한게 있습니까. 민족차별이 심한 남의 나라 땅이니 교포들끼리 서로 도와 잘 살아보자고 앞장 서 왔을 뿐인데..."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던 그는 자신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며 끝까지 겸손해 했다.

그는 재일교포 실업인들중 도쿄,오사카이외의 벽지에 거주하는 사람으로는 최초로 지난해 한국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모리오카=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