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은 지난 9일 비씨 LG 삼성카드 등 7개 카드사 사장들을 호출,가맹점에 물리는 수수료를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카드사들이 큰 폭의 이익을 낸 만큼 수수료 인하가 필요하다는 압력인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부도난 한국부동산신탁에 대한 법적조치(청산이나 법정관리)를 유예해 달라는 정부와 징치권의 요청을 외면한 일부 금융기관들은 지금까지도 지속적인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한 생보사 사장은 지난달 현대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하라는 금융감독원의 직간접적인 부탁을 거절한 후 곤욕을 치렀다.

관치금융 철폐를 위한 국무총리 훈령이 제정된 이후에도 이처럼 관치금융은 ''금융기관간 자율''로 포장된 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바람''을 잡고 은행장들이 테이블에 앉아 자율이란 형식을 빌려 결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국민과 주택은행 간 합병과정에 정부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금융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부는 개별은행 합병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밝혔다.

하지만 두 은행의 합병 진행과정은 언제나 금감위 입에서 생중계됐다.

뉴브리지에 팔린 제일은행조차 최근 정부의 회사채 강제할당에 반대하자 "거래기업으로 하여금 주거래은행을 바꾸도록 하겠다"는 당국의 협박을 받았다.

심지어 "햇볕이 쨍쨍할 땐 기업을 지원하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외면하는 금융기관은 사라져야 한다"(진념 재경부 장관)는 비난도 받았다.

호리에 제일은행장은 회사채 인수거부 파문이 일어난 직후 금융감독위원회를 방문,정상여신이 아니면 이사회 산하의 리스크소위원회에 올려 승인을 받도록 돼 있어 행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음을 설명해야 했다.

그나마 제일은행은 외국계 은행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대부분 은행들의 입장은 다르다.

공적자금이 들어간 한빛 조흥 외환은행뿐 아니라 우량은행들도 정부의 ''협조요구''에 자유롭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은행이 정부의 방침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반역과도 같다"는게 한 시중은행 임원의 고백이다.

호리에 행장이 정부의 요청에 대해 ''노(NO)''라고 하자 일부 은행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당국의 인사개입도 노조가 항상 시비 거는 사안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최근 금융관련 협회 운영의 개혁차원에서 협회장의 단임 및 비상근을 촉구했다.

배창모 전 증권업협회 회장의 연임 여부가 관심사였던 때여서 협회 노조는 금감위원장의 월권행위라고 비난했다.

한 은행 사외이사로 임명됐다가 도중에 사표를 낸 한 교수는 "사외이사 선출에도 관치의 손길이 작용했다"고 꼬집었다.

정부는 명실상부한 주식회사인 은행이나 보험회사 등을 ''금융회사''가 아닌 ''금융기관''으로 부르고 있다.

이름 자체에서부터 관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도 "시대가 바뀐 만큼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회사로 부르겠다"고 다짐했지만 현실은 동떨어져 있다.

정부는 "관치금융은 사라졌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과거처럼 명시적인 대출압력 등은 없다고 봐도 된다는 게 은행장들의 설명이다.

투신권에서도 주가를 떠받쳐달라는 등의 주문은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2000년 국가경쟁력 보고서''에서 세계 47개 조사대상국 중 한국 정부의 시장개입 정도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 이어 세계 6위라고 평가했다.

손상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그동안 은행이 관치금융의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은행의 수익성을 따질 형편이 못됐다"며 "이제 공공에 봉사하는 ''금융기관''이 아닌,주주를 위해 수익을 따지는 ''금융회사''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