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4시30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사거리 국민은행 앞 인력시장.

두툼한 외투에 모자 차림의 중년남자들이 가방을 둘러메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5시께가 되자 70여명으로 불어났다.

30분쯤 지나자 건설현장의 잡부를 구하는 건설업체 반장들이 승합차를 타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장들은 "김씨" "박씨"하며 몇몇 사람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낯익은 사람을 먼저 추려낸 뒤 30대로 보이는 몇몇에게 간단히 현장 경험을 물었다.

그리고는 ''합격자''들을 승합차에 태운 뒤 곧바로 공사 현장으로 떠났다.

반장들은 40세가 넘어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6시20분이 지나자 일꾼을 구하는 승합차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절반 정도는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일감을 찾지 못한 30여명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슴프레 날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리다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어느새 소주잔을 들고 있었다.

김용기(53)씨는 "하루벌이를 놓쳐 홧김에 벌써 소주 한병을 비웠다"며 "하루 걸러 한번씩 간신히 일자리를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에는 경기가 그런대로 괜찮아 어지간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며 "이제는 새벽에 나와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날이 많으니까 모이는 사람도 절반으로 줄었다"고 설명했다.

이달 초 퇴출판정을 받은 11개 건설회사가 활용하고 있는 일용직 노동자만도 16만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용직 노동자는 고용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어 일감이 없다는 것은 직접적인 생계 위협을 의미한다.

대로변에 형성되는 인력시장만 사정이 나쁜게 아니다.

정부가 운영하는 고용사무소에도 일감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지방노동청 일일취업센터에는 최근 일용직을 구해 달라는 상담이 3배 가까이 늘었다.

서울 양천구 남부 일일취업센터 고용상담원 김웅호씨는 "겨울철 공공근로사업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문의로 하루종일 전화가 북새통"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와 일거리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이날 집에서 쉬고 있다가 일일취업센터에서 연락이 와 부리나케 사무소로 달려나온 김홍태(44)씨는 "3일만에 ''하스리(콘크리트 깨는 일)''를 구했다"며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일거리에 비해 구직자가 넘치다보니 근로 조건도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구직 소개업체에 소개비로 5천원을 떼주고도 하루 5만원 벌이가 되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당은 4만원선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제대로 받기도 힘들다.

공사장의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자금난을 이유로 임금을 한달에 한두번으로 묶어 지급한다.

중소 건설업체의 반장인 김모(58)씨는 "임금을 제때 주지 못해 일꾼들로부터 욕 먹는게 다반사"라며 "일거리가 워낙 없으니까 일꾼들이 참고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

불법체류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처지는 더 딱하다.

중국에서 1인당 7백만원을 주고 10명이 함께 한국에 왔다는 중국교포 박모(50)씨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임금을 다른 사람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는데다 아예 임금을 떼먹는 회사가 수두룩하다"고 목청을 돋웠다.

그는 "모국에서 돈을 모으기는커녕 하루하루 살기조차 힘들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인력시장은 사실상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거리도 없고 찾는 이도 줄어들고 있다.

수십년 동안 하루벌이를 제공해 주던 육체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새벽 인력시장의 구직난이 심화될 경우 이는 곧바로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 대책은 항상 그대로다.

올 겨울에 일용직 근로자 5천명을 대상으로 공공근로를 시키고 건설일용직 근로자 1천명에게 12월부터 동절기 직업훈련을 실시하겠다는 정도다.

여기에 책정된 예산은 모두 합쳐 1백31억원에 불과하다.

백석근 건설산업연맹 정책기획실장은 "실직한 건설노동자들까지 가세하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며 "일감이 떨어지면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