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무선기기 생산업체인 M사의 K사장은 최근 건물주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11월 재계약때 임대료를 올리지 않을 생각이니 그대로 있어 달라"는 것.

건물주는 "굳이 나가겠다면 할 수 없지만 이사가겠다는 업체가 많아 제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아직 옮겨갈 곳을 찾지 못했으면 1년간 더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통사정했다.

불과 두달전만 해도 "다른 업체보다 평당 30만원 싸게 있으니 재계약때 같은 수준으로 임대료를 올려주지 못하면 사무실을 비워야 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던 건물주였다.

벤처기업들이 테헤란로를 빠져 나가고 있다.

코스닥 열풍에 휘말려 너도나도 이곳으로 몰려 왔던 벤처기업들.

벤처위기론과 맞물려 이들이 다시 테헤란로를 떠나고 있다.

갈수록 사업여건이 악화되고 있는데다 비싼 건물임대료와 극심한 교통체증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 외곽으로 옮겨가는 벤처기업이 늘고 있는 것.

<> 썰렁한 테헤란로 =최근 벤처기업들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테헤란로에 빈 사무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지난 5월 최고점을 기록했던 임대료로 서서히 하향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한국부동산경제연구소의 정광영 사장은 "지난 5월 0.2%선이었던 빌딩 공실률이 최근에는 0.6%선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지난해말 3백만원에서 지난 5월 4백만원으로 치솟았던 평당 임대보증금도 9월 들어서는 3백80만원대로 약보합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부동산 업체인 케드오케이의 임근율 이사는 "테헤란로의 임대료가 지나치게 높은데다 교통체증이 심각해 근무여건이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벤처기업들이 외곽지역으로 이사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이사는 "경제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임대재개약이 몰려 있는 10~12월에는 벤처기업들의 이동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또 "닷컴위기론이 팽배하던 4~5월의 경우 제조벤처나 대기업 계열의 벤처, 외국기업들이 인터넷 기업들이 빠져 나간 공백을 메웠으나 이번에는 대기자가 거의 없어 10월을 고비로 임대료가 큰 폭으로 떨어질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 북적이는 외곽지역 =서울 신대방동에 사무실을 낸 에두콘의 박성수 사장은 "서울 강북이나 분당 등 외곽지역으로 옮기면 돈도 절약하고 사무실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벤처들이 자주 접촉하는 정보통신부 등 정부기관과 대기업들이 대부분 강북에 있는 것도 원인이 되고 있다.

서울 순화동으로 옮긴 병원시스템 통합업체인 우신정보기술의 한 관계자는 "광화문지역에 있는 오프라인 기업과 만나는 일이 많아 강북이 좋다"고 자랑했다.

테헤란로를 떠난 벤처들이 다시 정착하는 곳은 분당, 광화문, 뚝섬,구로, 마포, 강동 등 새롭게 뜨고 있는 하이테크 지역.

분당은 대표적인 통신업체 집단지로 한국통신에 이어 지앤지네트윅스 두루넷 등이 앞다퉈 옮겨올 예정이어서 "제2의 테헤란로"로 급부상하고 있다.

마포구와 강동구도 활기를 띠고 있다.

그린바이오텍이 동교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씽크프리닷컴, 버추얼텍도 이 부근에 있다.

강도구청역 부근의 청해빌딩과 대산벤처타운에는 기존의 50개 업체와 함께 최근 테헤란로를 떠난 10여개 업체가 이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김태철 기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