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부부"에 관한 오래된 농담 한자락.한 부인이 용하다는 도사를 찾아왔다.

신혼시절 눈만 마주쳐도 활활 타오르던 남편이 언제부턴지 자신에게 통 관심이 없다는 것.

도사는 부적을 써주며 남편더러 주문을 외우게 하라고 했다.

단,부인은 절대 엿들어선 안된다는 조건.

처방은 즉각 효력을 발휘했고 부인은 내용이 몹시 궁금해졌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는 방으로 다가갔다.

들려오는 주문인즉슨 "내 마누라 아니다 아니다..."

"결혼"의 한 속성을 날카롭게 집어내는 유머다.

이에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스토리 오브 어스"(The Story of Us.30일 개봉)에서도 절절한 감동을 느낄법하다.

"스토리..."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롭 라이너 감독이 10년만에 내놓은 신작.

환상이 걷힌 결혼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세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낙천적인 소설가 벤(브루스 윌리스)과 꼼꼼하고 치밀한 완벽주의자 케이티(미셸 파이퍼)는 뜨거운 연애끝에 결혼한다.

백년해로의 단꿈도 잠깐.

아들,딸을 낳고 해가 갈수록 둘사이엔 달콤함 대신 짜증이 비집고 든다.

틈만나면 의미심장한 미소와 눈빛을 교환했던 그들은 서로에게 "화장실 휴지 하나 갈지 못하는 남자"나 "지긋지긋하게 잔소리 많은 여자"로 변한지 오래다.

언쟁과 신경전에 지쳐 침묵할때가 그나마 평화로운 순간.

아이들을 위해 다정한 부모역을 연기하던 그들은 끝내 이혼을 결심하고 별거에 들어간다.

작품의 최대 미덕은 살아 숨쉬는 현실감이다.

부부간의 대화 고민 전투에는 내가족,내 이웃의 모습이 들어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꾸려가는 이야기 솜씨도 즐겁다.

미묘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잡아내거나 유머있게 보여주는 가식도 재미있다.

파이퍼와 윌리스는 더없이 자연스런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고 에릭 클랩튼의 음악은 분위기를 더한다.

일견 행복해보이는 중산층의 위선이나 붕괴위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아이즈 와이드 셧"이나 "아메리칸 뷰티"와도 통한다.

하지만 "스토리..."는 문제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진 않는다.

가족의 해체나 붕괴를 초래하는 데 물질주의나 비인간화같은 사회적 이슈는 없다.

남편이 난봉꾼도 노름꾼도 아니요,통상 부부갈등의 주범인 돈문제로 쪼들리지도 않는다.

부부간의 갈등은 어디까지나 남녀간의 상투적인 차이에서 기인한다.

"개인"으로 범위를 좁힌 카메라는 달콤한 껍질을 끝까지 벗겨내 잔인한 현실을 드러내는 대신 "그들은 "비교적"행복하게 살았다"로 성급하게 막을 내린다.

이에 대해 미국 평단에서는 "대책없는 낙천주의"라거나 "여피의 방황기를 그린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스토리..."는 그래서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이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