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일의 그림읽기] (3)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회화적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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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1913∼1974) 화백이 1951년 부산 피란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에 유채,54X120㎝)
멀리 하늘과 바다가 펼쳐져 있고,가까이에는 모래사장과 항아리를 이고 메고 안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수화의 그림에서 두고두고 소중한 소재로 쓰인 항아리가 등장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1950년대 수화의 작품에는 으레 달과 도자기가 단골 손님처럼 화면에 앉아있었다.
수화는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이 살던 서울 성북동의 늙은 감나무 집(노시산방·老枾山房)을 물려받아 이 집의 마스코트였던 감나무를 자랑하고,정원에 대추 벽오동 목련 모란 옥잠화 국화 등을 잔뜩 심어놓고 가꾸면서 서화 골동을 애장하고 멋을 부렸다.
마당 우물가에 백자 항아리를 놓아두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술을 마시면서 백자를 완상(玩賞)했다.
취흥이 도도해지면 우물가에 놓아두었던 항아리를 들고 마당에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달이 뜬다.달이 떠.노시산방에 달이 뜬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처럼 수화는 백자 항아리를 달과 동일시할 만큼 크고 둥글고 환하고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그가 우리 백자를 얼마만큼 사랑했는지는 대학 교수 월급을 몽땅 털어주고 백자 한 점을 사들고 들어와 밤새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아내의 바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만 불렀다는 일화로 알 수 있다.
수화의 다른 그림과 달리 이 그림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이 그림이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소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하늘과 바다와 해변이라는 풍경이요,또 하나는 인물 군상이다.
그렇다고 풍경이 단순한 배경으로만 그려져있는 게 아니고 당당한 그림의 주역으로서 인물 군상과 동일화면 속에서 완전한 회화적 통일을 이루고 있는 점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단순화한 인물처리는 아르카익 풍의 목조상(木彫像)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수화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왔지만 어렸을 때 자연을 사랑한 정서가 오랫동안 작품 속에서 묻어나온다.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백만회를 조직,한해에 네 차례씩 발표전을 여는 열성파였다.
수화는 홍익대 미술대학장 자리를 내놓고 196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가 미국에 주저앉고 말았다.
뉴욕에 닻을 내리고 부인 김향안 여사의 내조로 마지막 예술의 꽃을 피운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수화의 이른바 점·선 작업은 뉴욕시대에 만들어진 역작이다.
수화가 1970년 예순이 다 된 나이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점으로 찍어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대상을 따낸 것은 우리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월간 art 발행인
(캔버스에 유채,54X120㎝)
멀리 하늘과 바다가 펼쳐져 있고,가까이에는 모래사장과 항아리를 이고 메고 안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수화의 그림에서 두고두고 소중한 소재로 쓰인 항아리가 등장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1950년대 수화의 작품에는 으레 달과 도자기가 단골 손님처럼 화면에 앉아있었다.
수화는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이 살던 서울 성북동의 늙은 감나무 집(노시산방·老枾山房)을 물려받아 이 집의 마스코트였던 감나무를 자랑하고,정원에 대추 벽오동 목련 모란 옥잠화 국화 등을 잔뜩 심어놓고 가꾸면서 서화 골동을 애장하고 멋을 부렸다.
마당 우물가에 백자 항아리를 놓아두고 친구들이 찾아오면 술을 마시면서 백자를 완상(玩賞)했다.
취흥이 도도해지면 우물가에 놓아두었던 항아리를 들고 마당에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달이 뜬다.달이 떠.노시산방에 달이 뜬다"고 노래를 불렀다.
이처럼 수화는 백자 항아리를 달과 동일시할 만큼 크고 둥글고 환하고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그가 우리 백자를 얼마만큼 사랑했는지는 대학 교수 월급을 몽땅 털어주고 백자 한 점을 사들고 들어와 밤새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아내의 바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만 불렀다는 일화로 알 수 있다.
수화의 다른 그림과 달리 이 그림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이 그림이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소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하늘과 바다와 해변이라는 풍경이요,또 하나는 인물 군상이다.
그렇다고 풍경이 단순한 배경으로만 그려져있는 게 아니고 당당한 그림의 주역으로서 인물 군상과 동일화면 속에서 완전한 회화적 통일을 이루고 있는 점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단순화한 인물처리는 아르카익 풍의 목조상(木彫像)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수화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왔지만 어렸을 때 자연을 사랑한 정서가 오랫동안 작품 속에서 묻어나온다.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백만회를 조직,한해에 네 차례씩 발표전을 여는 열성파였다.
수화는 홍익대 미술대학장 자리를 내놓고 1966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가 미국에 주저앉고 말았다.
뉴욕에 닻을 내리고 부인 김향안 여사의 내조로 마지막 예술의 꽃을 피운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수화의 이른바 점·선 작업은 뉴욕시대에 만들어진 역작이다.
수화가 1970년 예순이 다 된 나이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점으로 찍어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대상을 따낸 것은 우리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월간 art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