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07) '몽페를랑 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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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 교수가 3박4일 일정을 마치고 떠나려는 날 비행기가 6시간 지연됐다.
호텔 방을 새로 예약했다.
부인과 같이 호텔에서 쉬라고 조심스럽게 권했다.
하지만 그는 필자의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
점심시간 바로 뒤라 필자의 내자(당시 이화여대 교수)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솔직히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귀가해서 떠들썩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이에크 부부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인은 응접실 소파에서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하이에크 교수는 원고 정리를 시작했다.
필자는 "무엇을 드시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하이에크는 "진토닉 한 잔을 달라"고 했다.
큰일났다.
필자는 당시 진은 라벨에 써있어 알 수 있었으나 토닉워터는 어떻게 생겼는지 본 일이 없었다.
암만 찾아보아도 토닉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소다수인지 구분 안되는 것을 진에 탔다.
그래도 레몬은 마침 있어서 곁들였다.
하이에크 교수가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맛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답했다.
필자는 일단 안심했다.
후에 내자가 돌아온 뒤 물었더니,필자가 소다수를 타서 대접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 교수에게 어떻게 미안한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하이에크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필자에게 "자유시장경제"석학들 모임인 "몽페를랑회의( Mont Pelerin )"참가를 권유했다.
다음해 스위스 알프스 산중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가했다.
이 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의장인 하이에크는 필자를 이끌다시피 세계적 학자들에게 일일이 소개했다.
이 회의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 N 프리드만( Friedman ),스티그러,핼리스 등 자유경제의 석학들을 만났다.
"몽페를랑 학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후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배로 세계는 민주주의가 지배했다.
하지만 전 세계 신문의 경제나 사회면에서는 사회 민주주의와 정부주도에 의한 복지국가 건설론이 휩쓸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위기의식을 갖게된 하이에크는 "노예로 가는 길"을 저술했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하이에크는 1947년 4월 스위스 제네바 호수 주변에서 "몽페를랑 학회( Mont Pelerin Society )"를 결성했다.
사회주의 집단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의 정치 철학을 위한 모임이다.
그는 1960년까지 회장,이후 사망할 때까지 명예회장을 맡았다.
오늘날에도 "몽페를랑 학회"는 이어지고 있다.
이 무렵부터 하이에크는 "순수이론경제"영역을 초월,자유시장경제의 근본원리 등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생의 마감까지 전력을 기울인 "법 입법 자유( Law,Legislation,Liberty)" 의 대작을 출판한 뒤 손수 서명해 필자에게 보내왔다.
부끄러운 말이나 필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오한 내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서구의 마지막 문명 철학가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이런 유치한 질문도 했다.
"독일어는 언어 성질상 철학에 가장 적절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이 성했다는 것이지요"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봤다.
"논리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가장 명료하다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의 구절을 놓고 해석이 세가지 이상 나올 수 있는 것이 독일어다. 이런 점에서 영어가 훨씬 의미 전달이 명백하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하이에크 교수의 말씀이니 누가 여기에 토를 달랴.
그는 애타게 걱정하던 동유럽이 자유세계로 합류되는 것을 목격하고 1992년 3월 23일 9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사후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과 추종자가 늘어나는 하이에크 교수,그는 진정 인간과 사회를 생각한 따뜻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호텔 방을 새로 예약했다.
부인과 같이 호텔에서 쉬라고 조심스럽게 권했다.
하지만 그는 필자의 집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
점심시간 바로 뒤라 필자의 내자(당시 이화여대 교수)는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솔직히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귀가해서 떠들썩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이에크 부부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인은 응접실 소파에서 눈을 붙이겠다고 했다.
하이에크 교수는 원고 정리를 시작했다.
필자는 "무엇을 드시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하이에크는 "진토닉 한 잔을 달라"고 했다.
큰일났다.
필자는 당시 진은 라벨에 써있어 알 수 있었으나 토닉워터는 어떻게 생겼는지 본 일이 없었다.
암만 찾아보아도 토닉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소다수인지 구분 안되는 것을 진에 탔다.
그래도 레몬은 마침 있어서 곁들였다.
하이에크 교수가 몇 모금 마시는 것을 보고 "맛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답했다.
필자는 일단 안심했다.
후에 내자가 돌아온 뒤 물었더니,필자가 소다수를 타서 대접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 교수에게 어떻게 미안한지.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하이에크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필자에게 "자유시장경제"석학들 모임인 "몽페를랑회의( Mont Pelerin )"참가를 권유했다.
다음해 스위스 알프스 산중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가했다.
이 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의장인 하이에크는 필자를 이끌다시피 세계적 학자들에게 일일이 소개했다.
이 회의를 통해 노벨상 수상자 N 프리드만( Friedman ),스티그러,핼리스 등 자유경제의 석학들을 만났다.
"몽페를랑 학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후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배로 세계는 민주주의가 지배했다.
하지만 전 세계 신문의 경제나 사회면에서는 사회 민주주의와 정부주도에 의한 복지국가 건설론이 휩쓸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위기의식을 갖게된 하이에크는 "노예로 가는 길"을 저술했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하이에크는 1947년 4월 스위스 제네바 호수 주변에서 "몽페를랑 학회( Mont Pelerin Society )"를 결성했다.
사회주의 집단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의 정치 철학을 위한 모임이다.
그는 1960년까지 회장,이후 사망할 때까지 명예회장을 맡았다.
오늘날에도 "몽페를랑 학회"는 이어지고 있다.
이 무렵부터 하이에크는 "순수이론경제"영역을 초월,자유시장경제의 근본원리 등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생의 마감까지 전력을 기울인 "법 입법 자유( Law,Legislation,Liberty)" 의 대작을 출판한 뒤 손수 서명해 필자에게 보내왔다.
부끄러운 말이나 필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심오한 내용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서구의 마지막 문명 철학가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이런 유치한 질문도 했다.
"독일어는 언어 성질상 철학에 가장 적절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철학이 성했다는 것이지요"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봤다.
"논리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가장 명료하다는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의 구절을 놓고 해석이 세가지 이상 나올 수 있는 것이 독일어다. 이런 점에서 영어가 훨씬 의미 전달이 명백하다"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하이에크 교수의 말씀이니 누가 여기에 토를 달랴.
그는 애타게 걱정하던 동유럽이 자유세계로 합류되는 것을 목격하고 1992년 3월 23일 92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사후 시간이 흐를수록 명성과 추종자가 늘어나는 하이에크 교수,그는 진정 인간과 사회를 생각한 따뜻한 심정의 소유자였다.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