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5월 한일국교정상화이후 70년대초에 이르는 경제흐름을 설명한다.
이 무렵 추진한 지나친 정책들이 뒤에 대파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961~65년 군사정부의 무지에서 오는 시행착오로 경제는 표류했다.
다만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선각적 경제인들에 의해"수출주도"와 "외자도입"에 의한 개발전략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65년 한일국교정상화이후 외자는 봇물 터지듯 들어왔다.
정부가 차관에 지불보증을 하게 되니 차관에 의한 공장건설에 너도나도 덤벼들었다.
하지만 내자는 태부족이었다.
정부는 처음에 공장시설비용 외자만을 허용했다가 운영자금이 모자라니 운영자금조달을 위해 원부자재 차관도 용인했다.
나중에는 차관상환을 위한 추가 외자도 지불보증했다.
이 무렵 차관도입을 위해선 타당성조사나 상환능력보다 정치자금에 좌우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정경유착이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당시 외자도입심사위원이었던 이동욱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화학섬유공장 건설 신청이 2건 동시에 상정됐다.
하나는 8백만달러 또하나는 2백80만달러였다.
시설용량이나 조건은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2백80만달러 신청자에 인가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
그런데 뜻밖에 차관도입인가는 8백만달러 신청자에게 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던지고 외자도입심사위원을 자퇴했다"
이동욱씨는 그 후 필자에게 "2백80만달러보다 8백만달러 프로젝트에서 더 많은 정치자금을 뗄 수 있지 않겠소"라고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차관을 도입하다 1969년5월 재무부는 차관업체 83개중 45%가 부실기업이라고 발표했다.
청와대에"부실기업정리 조사반"이 설치됐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사방에서 둑이 무너지듯 부실기업이 속출하는데 땜질식 처방으로 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경제는 불황으로 치달았다.
닉슨 미국대통령은 계속되는 무역적자로 1971년8월15일 미달러화 방어에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미 달러화의 금태환정지,10%수입부가세 신설 등을 통해 자유무역주의에서 보호무역으로 전환했다.
이는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의 수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각국의 불황은 한국의 수출주도 개발전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수출증가율은 1968년 42%에서 69년 34%,70년 28%로 크게 둔화됐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외자도입은 수년간의 거치기간이 지나 상환이 시작됐다.
정부는 때마침 71년 수출촉진을 위해 일시에 원화를 18% 평가절하했다.
IMF(국제통화기금)권고에 따라 70년부터 강력한 긴축정책을 시행해오던 터였다.
금리는 치솟고 고리채는 연리 30%를 웃돌았다.
이렇게 되니 차관을 빌려 쓴 기업체는 사면초가가 됐다.
세계불황 수출부진 자금경색 등 3중고로 국내경기는 전반적인 침체를 넘어 공황조짐마저 나타났다.
차관기업의 도산이 속출하면서 드디어 건설업 등 내수산업 전반이 부도위기에 빠졌다.
기업도산은 금융위기로 번지기 마련이다.
사채를 쓰는 기업들은 사채업자로부터 한꺼번에 어음교환을 당해 부도위기에 처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연쇄도산이 일어나면 은행도 큰 일이다.
그러니 사회전체가 뒤숭숭할 수밖에...
이쯤되니 전경련 회원사들도 난리가 났다.
특히 건설업 시멘트 건축자재업자들은 돌아오는 어음을 막느라 얼굴이 사색이 됐다.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1971년 6월 초순, 전경련은 긴급이사회를 열어 전경련 예산을 50% 삭감,이 자금을 기업에 환원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심상준 제동산업 사장은 "국내 재원이나 관리능력을 도외시한 외자도입에 의한 공장건설은 총부실사태를 가져왔다"며 "위기의 국가경제를 구하기 위해 전경련 예산을 반으로 줄여 이 자금을 기업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김입삼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