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 방어문제를 놓고 정부가 딜레마에 빠졌다.

워낙 갑작스럽게 달러화가 밀려들어오고, 이로인해 원화가 빠른 속도로
절상되는 바람에 정부는 정책조합(policy mix) 선택에 꽤나 애를 먹고 있다.

현재까지 외환시장에 알려진 바로는 정부는 물가안정과 금리안정을 위해
원화절상을 용인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환당국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재정경제부 윤용로 외화자금과장은 "물가안정 때문에 환율하락(원화절상)을
허용한다는 얘기는 잘못된 것"이라며 "(환율의) 급격한 하락은 급격한
상승을 낳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심훈 부총재도 "일시적인 교란요인을 제어한다(스무딩)는 기왕의
방침에서 전혀 달라진게 없다"고 설명했다.

원화가치 방어에 직접 나서는 실무자도 "종전보다 개입규모가 많으면 많지
적지는 않다"고 밝혔다.

요컨대 정부는 원화가치 급등을 막기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물리적인 한계(급속한 달러유입) 때문에 원화절상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시장관계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정부가 달라졌다"고 말하는 딜러들이 한둘이 아니다.

정부는 일차적으로 금리안정 때문에 외환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외환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정부는 원화가치 안정을 위해 하반기중 5조원어치의 외평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국회로부터 승인받았다.

외국인주식투자자금이 대거 유입되자 지난 11월24일 1조원어치의 외평채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해 회사채금리는 연 9.5%에서 9.7% 수준으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정부는 외평채 발행에 신중하다.

내주중 1조원 어치를 발행한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시장분위기를 돌려
놓기에 역부족이다.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를 사들이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통화팽창을 낳아 물가불안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해외자본 유입때문에 풀려진 통화는 통상적으로 통안증권 발행을 통해
흡수한다.

그러나 통안증권 발행잔액은 50조원을 넘은지 오래다.

연간 이자비용은 3~4조원에 이른다.

추가발행이 쉽지 않다.

원화절상은 물가상승을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한은 분석에 따르면 환율이 10% 하락(원화가치는 절상)하면 소비자 물가는
최대 1.7% 하락한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내년도 인플레가 우려되는 가운데 정부 입장에선 원화
절상은 되레 반가운 손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자본이 밀려오고 경상흑자가 큰 요즘같은 시기야말로 외환보유액
을 늘리기에 호기라는 외환전문가들의 견해도 없지 않다.

한 외환당국자도 "외환보유액이 7백억달러에 이른다고 하지만 국제기구
등으로 빌려온 2백40억달러를 빼면 5백억달러도 안된다"며 "보유액을 1천억원
가량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주식투자자금이 6백억달러에 달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도 현재까지 외환보유액을 추가 확충하겠다는 방침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같이 경제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탓에 정부는 요즘 "개입은 평소
보다 다소 늘리되 시장흐름을 최대한 존중"하는 식의 개입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여러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욕심인 것 같다.

그러나 연말 수출에 기대를 걸고 있는 수출업체들은 원화절상으로 인해
화병이 날 정도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 이성태 기자 stee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