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언론대책 문건" 폭로에서 시작된 여야 대립이 "빨찌산 발언"의
증폭 과정을 거쳐 대통령 명예훼손 여부를 둘러싼 "서경원 사건" 재수사로
번져나가면서 정치권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난기류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권은 제2차 창당준비위 영입인사 30명을 공개함
으로써 2천년 총선 전략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영입인사 가운데는 5공 시절 "땡전뉴스"를 맵시 있게 진행했던 언론인
이 있는가 하면 유권자들의 기억에서 지워진지 오래인 옛 권위주의 시대 장관
경력 소유자도 여럿 끼어 있다.

21세기는 "자원 재활용"의 시대니 만큼 여권이 이런 인물들을 가지고
"21세기형 신당"을 만들지 못하란 법은 없으니 시비를 걸지는 않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신과 5공 독재를 향해 돌멩이 한 번 던져본 적이 없는 "엘리트 경제관료"
를 386세대의 상징인양 포장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요구 덕분에 386세대는 "정치시장"에서
상한가를 치는 중이다.

어디 그뿐인가.

과거 학생운동에 붉은 칠을 하는데 팔을 걷어부쳤던 어느 언론사는 반체제
투쟁으로 날을 지새웠던 386세대를 주인공으로 한 화려한 특집을 연재했다.

억대 연봉을 받는 펀드 매니저,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소설가, 코스닥 시장의
스타로 뜬 벤처 사업가 등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하고 큰돈을 번 30대는
무조건 386세대의 대표가 된다.

여권지도부는 신당 추진위원으로 발탁된 30대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리지 않고 "386 스타" 대우를 해준다.

386세대는 그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를 통칭하는
말이 아니다.

4.19세대, 6.3세대, 민청학련 세대 등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고뇌하고 행동하고 개인적 희생을 감수했던 비판적
지식인 집단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이다.

386세대는 이러한 정체성과 비판의식을 지키면서 기성 질서의 모순과 대결할
때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노령화된 정치권력의 "생물학적 불균형"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386세대의 정계 진출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문제는 정치적 거품이다.

기존 여야 정당들은 모두 뚜렷한 강령이 없이 특정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생존을 지키고 민주적인 토론보다는 총재 개인의 지도력에 의존하는 "지역
선거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당들이 앞다투어 젊은 정치지망생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내년 총선
에서 젊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잡아끌기 위한 장식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왕 화장을 하기로 했으면 짙은 화장이 좋고, 그러자면 자기네가 영입한
"386 대표주자"들을 둘러싼 정치적 거품이 풍성할수록 좋다.

386세대는 지난 80년대 끈질기고 조직적인 반독재 투쟁을 감행했고 결국은
6월 민주항쟁의 승리라는 집단적 업적을 이룬 세대이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민중민주주의파"와 같은 관념적 급진주의에 휩쓸렸고,
한때나마 "주체의 수령관"을 빙자한 반지성적 권위주의 문화를 내면화하는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던 세대이기도 하다.

지금 정계에 입문하는 "전대협" 시대 학생운동의 "스타"들은 기존 정당의
전략적 환대와 언론의 정치적 선정주의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거품을 경계하는
성찰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 용광로 같았던 80년대를 함께 겪었던 수많은 "이름 없는 386"들이 정계에
입문하는 "어제의 스타"에게 기대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권위주의적 기성
정치풍토에 당차게 도전하는 것이다.

"386세대의 대표성"은 80년대의 훈장이 아니라 지금부터 찾아 세워야 할 그
무엇이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