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함 속에 짙은 비애가 묻어나는 소설.

발랄하게 걷다가도 뼈아픈 무게감으로 눌러오는 소설.

김탁환(31)씨의 새 장편 "누가 내 애인을 사랑했을까"(푸른숲)는 그런 작품
이다.

작가는 "애인"으로 통칭되는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꿈과 상처를 여섯개의
테마로 엮어냈다.

왜곡된 욕망과 집착, 서투른 영혼들의 사랑 이야기를 아름답고 슬픈 문체로
그렸다.

첫번째 이야기 "치욕"은 "사랑의 먹이사슬이 생태계의 사슬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남주헌이라는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여자 최정숙.

그러나 주헌은 대학시절 영원한 애인이었던 류농옥을 잊지 못한다.

그는 단편 영화 "유월의 신부"에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농옥에게 언제든
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

그를 향해 정숙은 반응없는 메아리를 끊임없이 보낸다.

결혼한 뒤에도 남자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남편이지만 아직도 남의 남자인 그의 "등"만 바라보던 그녀는 주언이 이혼한
농옥을 찾아 떠나자 마침내 목을 맨다.

"한 사람은 더 사랑하고 한 사람은 덜 사랑하는 불평등 사슬"을
끊는 것.

그녀가 치욕을 이기는 최상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 "청순"과 "관능"에서는 수녀를 꿈꾸던 김해정과 차라리 창녀가
되겠다는 비비안이 나온다.

티 한점 없는 깨끗함이 손상받는 순간 그것이 무서운 폭력으로 반전될 수도
있다는 명제가 담겨있다.

세상의 흐름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해정은 지나친 순수성으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학생운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듣던 그녀는 뒤늦게 데모에
가담했다가 시위대에 깔려 죽고 만다.

그녀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던 비비안은 어떤가.

죽음과 쾌락을 혼동하며 관능의 늪에 빠졌던 비비안은 장형비라는 사내를
만나면서 무너져 내린다.

해정에게 보낸 편지가 수취인 부재로 돌아온 뒤에는 검은 수녀복을 입고
63빌딩에 나타난다.

서로 다른 좌표를 가진 두 여성이 하나의 꼭지점에서 만나는 데목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속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장형비는 "위악"의 상징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지막 얘기 "박애"의 주인공은 아예 영원한 실종을 택한다.

명현도는 학창시절 친구 라성희가 목을 매고 류농옥이 사연많은 생을 건너는
동안 외무고시를 거쳐 이스탄불로 향한다.

그가 소설속의 후배 김탁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막에서 증발하는
장면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스무살 때는 길이 아주 많을 거란 생각을 했어.하지만 길은 하나뿐이었어"

주인공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80년대의 그늘을 지나면서 최정숙과 김해정은 자의든 타의든 죽음을 맞고
명현도는 자신의 자리를 지워버렸다.

그들은 작가의 말처럼 "생의 알리바이" 하나 없이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
아웃사이더들이다.

지난 시절 그들의 사랑이 왜 그토록 치명적이었던가를 곱씹어보는 것은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