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레저] (드라이브 코스) '강원도 춘천 신숭겸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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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줄기를 끼고 달리는 호반 드라이브를 즐겨보자.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상쾌하다.
의암호를 끼고 달리는 호반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붕어섬과 중도유원지가 그림처럼 떠있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한가롭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4대 명당지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은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명당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미끈미끈하게 뻗은 키 큰 소나무가 묘역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다.
나직이 엎드린 작은 산은 의암호를 품고 있다.
그런데 조금 눈여겨 이곳을 살펴보면 여느 묘역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묘의 봉분이 세개나 된다는 점이다.
또한 묘비와 상석 외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수 있는 문무헌석, 망부석,
석등 등의 조형물이 일절 없다.
이 정도의 규모에 석물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지만 이는 풍수지리상 석물을 쓰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요소가 산세를 흐트리거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묘의 봉분이 세개가 있는 것은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51대 진성여왕 때부터 중앙 정부의 부패로 나라가 쇠약해지자 여기저기에서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중 원주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양길의 세력이 점차 커지던중 그의 부하로
활약하던 궁예가 철원 지역에서 반기를 들고 독립해 국가의 틀을 세우게
된다.
궁예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개성지방 토호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왕건
부자가 자진해서 궁예의 휘하로 들어오자 궁예는 왕건을 철원 태수로 삼는다.
궁예는 휘하에 왕건 복지겸 삼능산 등을 앞세우고 세력을 계속 넓혀 양길의
본거지인 원주까지 함락시킨다.
서기 901년에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수도를 송악에 정했다가 그 이듬해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친다.
이렇게 나라를 세운 궁예는 국력이 강해지자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두 아들을 보살이라 하며 사치한 생활과 횡포를 거듭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이에 태봉국의 핵심 장군이었던 신숭겸과 배현경 복지겸 등이 덕망 높던
왕건을 앞세워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고려의 태조
이다.
한편 전주(당시 완산)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견훤(?~936)은 백제의 옛
강토임을 상기한다는 뜻에 국호를 후백제라 칭하니 이때를 후삼국시기라
한다.
고려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신라 54대 경애왕은 고려에 호의를 보내며
화친하자 불안감을 느낀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공한다.
신라 경애왕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경애왕을 죽여버리고 고려의 지원군이 올 것을 예측하고 대구 공산
에서 매복해 기다린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숭겸
장군과 5천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신라를 도우러 갔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왕건과 체구가 비슷했던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왕의 마차를 타고 역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견훤군은 왕의 옷을 입은 신숭겸이 고려의 왕인 왕건인줄 알고 전리품으로
목을 잘라가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왕건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장군을 애통해 하며
목없는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머리부분을 금으로 만들어 후하게
장사 지냈다.
이때 금 두상이 도굴당할 것을 염려해 봉분을 세 개로 만들었다.
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는 임금이 본관이나 성씨, 이름을 내려
주는 일이 있다.
신숭겸 장군의 원래 이름은 삼능산이었으나 임금이 시호를 장절공, 이름은
신숭겸이라 하여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방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신숭겸의 묘역에는 충절문이 있고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신숭겸의 영정이 모셔진 장절사가 있다.
조선조의 학자이며 시, 서, 화 대가로 이름난 자하의 글씨로 만든 신도비와
기념관도 들러볼만하다.
이준애 < 한경자동차신문 출판부장 >
[ 어떻게 가나 ]
서울~춘천을 잇는 국도 46번인 경춘가도를 탄다.
망우동을 넘거나 워커힐 강변로를 빠져 구리시 교문동 사거리에서 경춘
가도로 진입한다.
마치터널 마석 구암리 청평 가평 강촌을 지나 춘천시로 들어가기전 화천
방향으로 빠지면 호반도로인 서면가도가 펼쳐진다.
춘천시내에서는 의암교를 건너와 우회전해 서면가도를 탄다.
서면가도를 타고 7.8km 달리면 왼쪽으로 신장공충절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좌회전해 2.6km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신장공충절묘
진입로와 주차장이 보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4일자 ).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 있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묘역을 찾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상쾌하다.
의암호를 끼고 달리는 호반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붕어섬과 중도유원지가 그림처럼 떠있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한가롭게 펼쳐진다.
우리나라 4대 명당지중 하나로 손꼽히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은 풍수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명당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미끈미끈하게 뻗은 키 큰 소나무가 묘역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다.
나직이 엎드린 작은 산은 의암호를 품고 있다.
그런데 조금 눈여겨 이곳을 살펴보면 여느 묘역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묘의 봉분이 세개나 된다는 점이다.
또한 묘비와 상석 외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수 있는 문무헌석, 망부석,
석등 등의 조형물이 일절 없다.
이 정도의 규모에 석물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지만 이는 풍수지리상 석물을 쓰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요소가 산세를 흐트리거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아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묘의 봉분이 세개가 있는 것은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51대 진성여왕 때부터 중앙 정부의 부패로 나라가 쇠약해지자 여기저기에서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중 원주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양길의 세력이 점차 커지던중 그의 부하로
활약하던 궁예가 철원 지역에서 반기를 들고 독립해 국가의 틀을 세우게
된다.
궁예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개성지방 토호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왕건
부자가 자진해서 궁예의 휘하로 들어오자 궁예는 왕건을 철원 태수로 삼는다.
궁예는 휘하에 왕건 복지겸 삼능산 등을 앞세우고 세력을 계속 넓혀 양길의
본거지인 원주까지 함락시킨다.
서기 901년에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고 수도를 송악에 정했다가 그 이듬해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친다.
이렇게 나라를 세운 궁예는 국력이 강해지자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두 아들을 보살이라 하며 사치한 생활과 횡포를 거듭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이에 태봉국의 핵심 장군이었던 신숭겸과 배현경 복지겸 등이 덕망 높던
왕건을 앞세워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고려의 태조
이다.
한편 전주(당시 완산)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견훤(?~936)은 백제의 옛
강토임을 상기한다는 뜻에 국호를 후백제라 칭하니 이때를 후삼국시기라
한다.
고려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신라 54대 경애왕은 고려에 호의를 보내며
화친하자 불안감을 느낀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공한다.
신라 경애왕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은 경애왕을 죽여버리고 고려의 지원군이 올 것을 예측하고 대구 공산
에서 매복해 기다린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숭겸
장군과 5천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신라를 도우러 갔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왕건과 체구가 비슷했던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옷으로 바꿔 입고 왕의 마차를 타고 역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견훤군은 왕의 옷을 입은 신숭겸이 고려의 왕인 왕건인줄 알고 전리품으로
목을 잘라가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왕건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장군을 애통해 하며
목없는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머리부분을 금으로 만들어 후하게
장사 지냈다.
이때 금 두상이 도굴당할 것을 염려해 봉분을 세 개로 만들었다.
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공신에게는 임금이 본관이나 성씨, 이름을 내려
주는 일이 있다.
신숭겸 장군의 원래 이름은 삼능산이었으나 임금이 시호를 장절공, 이름은
신숭겸이라 하여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지방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신숭겸의 묘역에는 충절문이 있고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신숭겸의 영정이 모셔진 장절사가 있다.
조선조의 학자이며 시, 서, 화 대가로 이름난 자하의 글씨로 만든 신도비와
기념관도 들러볼만하다.
이준애 < 한경자동차신문 출판부장 >
[ 어떻게 가나 ]
서울~춘천을 잇는 국도 46번인 경춘가도를 탄다.
망우동을 넘거나 워커힐 강변로를 빠져 구리시 교문동 사거리에서 경춘
가도로 진입한다.
마치터널 마석 구암리 청평 가평 강촌을 지나 춘천시로 들어가기전 화천
방향으로 빠지면 호반도로인 서면가도가 펼쳐진다.
춘천시내에서는 의암교를 건너와 우회전해 서면가도를 탄다.
서면가도를 타고 7.8km 달리면 왼쪽으로 신장공충절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좌회전해 2.6km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신장공충절묘
진입로와 주차장이 보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