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페리.

그는 요즈음 중요한 시나리오에 매달려 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대북전략을 담게될 이른바 페리보고서 를 쓰고 있는
중이다.

현지동정을 살피기 위해 페리는 아시아 시찰을 이미 끝마쳤다.

현자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 스탠포드 대학 등 유수대학들을 찾아 다니며
귀동냥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임동원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최근 워싱턴을 찾은 것도 페리보고서와
무관치 않다.

3월중에 발표될 것으로 알려진 페리보고서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표명의 일환이었다.

미국인들은 "금창리=핵무기" "미사일=운반체" "핵무기 운반체=미국안보위협
"이라는 등식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화요일에 있은 상원 국방위원회는 이같은 미국인들의 민감한
분위기를 반영한 무대였다.

"미국의 안보위협 요인"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청문회에서
미국중앙정보국(CIA) 조지 테네트 국장은 코소보 이란 이라크 마약등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들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날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미사일 문제였다.

미시간 출신의 칼 르빈 상원의원은 테네트 CIA국장에게 북한의 미국에
대한 핵위협을 계량화해서 숫자로 보고해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금창리 지하핵시설과 미사일 발사에 자극받은 공화당에게 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이미 사문서(사문서)나 다름없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도높게 비판해 온 공화당의 크리스토퍼
콕스 정책위의장은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돈과 바꾸려 했던 클린턴이 이제는
미사일까지 돈으로 사들이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정도다.

이같은 공화당의 집중 포화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의 대북행보는 기분나쁠
정도로 차분하다.

서두르지 않는다.

중국 북한 남한과 더불어 4자회담도 적극적으로 해본다.

찰스 카트만 한반도평화회담 전담특사를 동원,북한에 대해 금창리 지하시설
현장사찰을 진지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본다는 제스쳐다.

하지만 이같은 냉정함 뒤에 숨겨있을 지 모르는 미국의 진의에 더 신경이
간다는 게 한국의 표정이다.

표면상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은 없다.

금창리 사찰협상과 4자회담에 참석했던 카트만대사 등은 적지않은 진전이
있다고 강조하지만 그것은 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미국의 좌절은 처음부터 예견된 것인 지도 모른다.

북한문제에 관한한 싫든 좋든 모든 열쇠는 북한이 쥐고 있다.

"미국이나 우리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돼 있을 뿐"이라는
이홍구 주미대사의 표현이 이를 대변한다.

페리팀이 내놓을 내용을 예단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페리팀과 접촉한 양성철국민회의 의원은 페리보고서가 <>한국과의
정책조화를 유지하고 <>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 정신을 저해하지 않으며
<>의회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3대원칙의 틀속에서 기술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이 취하고 있는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햇볕을 볼 수 있는 전향적인 시나리오가
작성됐으면 좋겠다"는 한국측의 희망을 존중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주문한 클린턴이 당근보다는 채찍을 중시하는 공화당
주도의 의회입장을 적극 수용하는 동시에 대북전략에 대한 획기적인 수정을
제시할 지 모른다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작년에 국방성이 느닷없이 내놓은 동아태전략보고서,
이라크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코언 국방장관, 샌디
버거 백악관안보담당보좌관 등의 끊임없는 북한에 대한 경고는 "페리
쇼크"의 전주곡인 지도 모른다.

제네바기본합의서를 이끌어 낸 갈루치 북한핵담당대사는 한국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94년 미국이 북한핵시설을 공격하려 했던 계획이 다시 검토대상에
오를 수 있느냐는 한국기자들의 질문에 "그렇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가 크루즈미사일의 위협아래 놓일 수도 있다는
분석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냉전종식 이후 미국의 군수산업이 극심한 변비에 걸려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등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한반도는
이라크와는 지정학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군사적 위기상황은 기우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함으로써 남한까지 송두리 째 잃어버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에도 수긍이 가지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외환위기도 그 중 하나였다.

군사적 위기상황은 그 확률이 아무리 작더라도 철저히 배제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자 민족적 과제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