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나라에서 준우승에 그친 황염 2단.

그는 94년 결혼과 함께 한국국적을 취득한 조선족2세다.

이번 결승대국에서 석패해 바둑계를 안타깝게 만든 황2단은 지난 65년 중국
산시성 타이웨엔에서 중국인 아버지 황여랑씨와 조선족 어머니 안정숙씨의
슬하에 1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둑에 입문한 계기는 문화혁명.

9살때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오전에 학교수업을 마치면 오후엔 할일이 없어
오빠와 함께 공원에 자주 갔다.

그곳에선 으레 바둑과 체스 경기가 벌어졌고 후일 황염은 기사로, 오빠는
체스선수로 성장했다.

황염은 14살때인 79년 중일청소년대항전에 출전, 4전 전승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계기로 산시성 대표가 됐고 17살때에는 프로 3단을 인정받았다.

그는 승단대회를 통해 84년 4단, 85년 5단으로 올랐다.

하지만 뚜렷한 후원세력이 없어 이때까지 중국대표팀에 발탁되지는 못했다.

황염은 이후 영춘배, 북염배 등을 제패했고 89년 여류명인전에서 우승했다.

당시 "세계 최강" 루이나이웨이와 양후이, 공샹밍 등을 물리쳤다.

중국대표팀에서 손짓이 왔으나 황염은 오기가 발동, 제의를 거절하고 한국
생활을 모색했다.

91년 두차례에 걸쳐 "어머니의 나라"를 찾았으나 출입국관리법에 걸려
발걸음을 돌렸다.

한중수교 이전이어서 출입국에 제약을 받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아마추어 3급인 신윤곡(36)씨의 열렬한 구애가 찾아왔다.

신씨는 "바둑"지에 실린 황염을 보고 홀딱 반해 수소문을 통해 7차례나
황염집을 방문, 결혼승락을 얻어냈다.

황염은 94년 신씨와 결혼했다.

한국인으로 제2의 바둑인생을 열었다.

한국기원은 당시 황염에게 2단 자격을 부여했다.

그는 그러나 1남1녀를 낳고 돌보느라 바둑성적이 저조했다.

기력이 되살아난 계기는 허장회 도장에 나가 바둑수업을 본격화하면서부터.

그는 올들어 이날까지 한국여류기사중 22승19패(53.7%)로 다승과 승률 부문
선두에 섰다.

한국프로고수들은 황염의 바둑을 "힘이 좋고 탄탄하다"고 평가한다.

< 유재혁 기자 yooj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