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끝으로 헐벗은 나무들 늘어섰던가/그 때도/애를 업고 섰었던가/빈
손의 추운 남자들 대어의 살 다/뜯긴 채/뼈만 끌고 돌아오는 곳/거울속에
거울속에 거울속에 거울속에/갇힌 것처럼/다른 생의/언젠가 아득한 곳에서도/
이런 똑같은 풍경속에 잠겨 있었던가"

시인 최정례(43)씨의 눈빛은 깊다.

그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뿌리는 더욱 깊다.

두번째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는 삶의 심연뿐만 아니라 존재의
안팎까지 함께 비추는 렌즈다.

"안"이면서 "바깥"인 양면거울.

그의 시선은 "둥글게 부풀었다"가 어느 순간 느낌표나 물음표처럼 흔들리는
나무줄기를 타고 뫼비우스 띠같은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간다.

그런가하면 고통과 환희의 대상인 "그"를 "나무 속으로 밀어넣"고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나는가 싶더니 "쓱/나무 속으로 들어가/아무 것도 아닌
표정으로/손바닥 내밀고/아니야 아니야" 흔들린다.

사물의 안팎을 경계짓지 않는 무색계의 영역, 그곳에서 그는 숲의 "나무"와
도회의 "먼지"를 동시에 본다.

어느날 "늦게 불이 켜진 약국"을 지날 때도 시인은 과거와 현재, 상처와
치유, 독과 약을 동시에 껴안는다.

"예리한 칼 같은 것에 살을 베이면/베이는 순간은 통증을 모른다"는 선체험
이 "참 나란히도 정리되어" 있는 약병들을 통해 육화된뒤 "한참 후에야
쓰라림과 욱신거림은 온다"는 후체험으로 이어진다.

"약국의 셔트가 내려질 시간"에야 비로소 고통과 "붉은 알약"을 발견하는
우리.

삶이 "소낙비 매맞는 움막"보다 더 매몰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황소 뱃속 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고 아파트가 당첨됐으나 허물어지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고 아무나 붙잡고 사정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기계적인
디지털 신호만 반복한다.

"나가라는군 초록불이 켜지면 방을 빼라는군 빗자루와 비누걸레는 늘
협박이지 옷 입고 샤워하다 3분만에 밀려나는군 아무리 방망이로 땅을 쳐도
끄떡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3분 자동 세차장")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은 자주 머뭇거린다.

욕망의 근원을 모자에 빗댄 시 "그 모자"에서 그는 "모자를 갖고 싶었,/말도
못했다/.../모자 올려놓는 것을 금지했,"하며 사회적 억압을 숨막히는 미완결
어법으로 끊어 표현한다.

그리고 막상 "그들이 모자를 사주겠다고/세상 모자를 다 끌어다 놓고"
덤빌 때 "모자를 쓰고 걷는 자들/머리에 썩,/어울리게 모자를 얹어놓은 자들"
을 조롱한다.

말문이 콱 막힐 것같은 역설의 칼금으로 그는 "목을 휘감고 아우성치던"
금역과 "모자 밑을/흘러갔을 바람들"을 불러 모으고 마침내 스스로 갇힌
나무들의 겉옷을 벗겨낸다.

그곳에서 만나는 "꽃핀 한 그루 나무".

거울밖으로 걸어나온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복숭아"가 솔잎처럼
정수리를 친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7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