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릴 자와 죽일 자"를 가르는 기업 살생부가 나돌며 주가가 또다시 연중
최저치로 추락했다.

국가 부도사태(모라토리엄)가 우려되면서 10년만에 최저주가를 기록했던
지난해 12월 수준까지 떨어졌다.

은행을 통한 기업구조조정 스케줄이 살생부 파문과 증시동요로 자칫 수포로
돌아갈 판이다.

12일 주식시장에선 기업 살생부에 대한 공포감으로 재무구조 불량주와
부실징후 기업을 중심으로 무더기 투매사태가 빚어졌다.

살생부가 정해지기 전에 대출금을 회수하려는 금융권의 움직임이 감지되자
객장엔 "팔자" 주문이 홍수를 이뤘다.

하한가 종목이 무려 3백15개나 쏟아져 올들어 가장 많았다.

업종별로도 부실징후기업이 몰려있는 은행(하락율 8.34%) 증권(6.07%)
건설주(5.84%)가 폭락했다.

그결과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전일보다 9.72포인트(2.68%)가 떨어진 351.86
에 마감됐다.

장중한때 350선이 무너지기도 했으나 외국인이 매수우위(1백11억원)를
보이면서 가까스로 350선을 지켰다.

이날 증시에선 험악한 소문이 나돌았다.

"기업구조조정과 함께 자금경색 현상이 극심해질 것으로 예상한 은행 종금
보험 등이 부실징후 기업은 물론 멀쩡한 기업에 대해서도 대출금 회수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에서부터 "이런 이런 기업은 벌써 "죽일 자"로 결론이
났다"는 등 온갖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구조조정에 대한 세련된 수순이 마련되지 않는 한
기업 살생부 파동이 멀쩡한 기업마저 상처를 내게 생겼다"며 "당국의 교통
정리가 없으면 살생부 파동과 주가추락이 금융경제는 물론 실물경제마저
마비상태로 몰고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낼 것"으로 우려했다.

그는 기업 정리문제에 대해서도 "제일 서울은행이 자본금을 8분의 1로
줄인뒤 다시 돈을 쏟아부었지만 주가가 감자직전인 연초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은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친 때문"이라며 "3월초 1백11조원을 넘었던
싯가총액이 최근 두달 사이에 69조원으로 떨어져 42조원이 증발한 것도
갈팡 질팡했던 구조조정에 대한 비싼 댓가"라고 말했다.

아시아 금융시장이 여전히 불안한데다 구조조정이 코 앞에 닥친 증권 투신
은행 등 기관투자자의 주식처분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도 주가하락을
부추겼다.

96년 3월 이후 2년만에 2조원 아래로 떨어진 고객예탁금도 수급악화에
대한 우려감을 높였다.

향후 주가 전망에 대해서도 시장관계자들은 "주가는 많이 떨어졌지만
뚜렷한 매수주체가 없고 수급여건이 열악한데, 불안한 아시아금융시장이
가닥을 잡지 못해 낙관하기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 허정구 기자.huhu@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