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출했다.
"외주비 2백63억원, 자재비 99억원, 운영비 68억원"이라고만 적혀 있는
서류에는 증빙자료라곤 도무지 없었다.
그러나 법원은 보충자료를 제출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하루만에 자금지출을
사인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출허가를 받은 돈이 본래 용도대로 쓰였는지를 점검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영수증 대조작업은 커녕 영수증 제출을 요구하지도 않고 있다.
부실에 빠진 법정관리제도의 한 단면이다.
관리기업의 수는 늘어만 가는데 이를 전담할 인력과 전문성이 부족한 때문
이다.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가 관리중인 회사는 회사정리 66개사, 화의 49개사
등 모두 1백15개사에 달한다.
전담판사는 부장 1명에 배석판사 3명.
배석판사 1인당 40개정도의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검토해야하는 서류는 "자금지출허가 신청서" "월말보고서" "자금
수지상황보고서" 등 하루 평균 2백~2백50여건에 이른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서류를 일일이 검토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수박 겉핥기식으로 검토한뒤 "허가"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다.
이러니 "법원에 자금관련 보고서 1백건을 올릴 경우 판사로부터 구체적인
질문을 받거나 보충자료 제출요구를 받아 홀드(보류)된 것은 채 5건도 안될
것"(S사 자금부 직원)이라는 얘기도 나올 정도다.
법정관리의 부실은 절차상의 문제에 그치는게 아니다.
심지어 법원을 속여 "딴 주머니"를 차는 부조리까지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은 허위 자금신청이나 보유자금내역의 허위보고.
예컨데 보고서상에는 회사보유자금이 1백억원이라고 기재하지만 실제로는
70억~80억원밖에 없고 20억~30억원은 위장계열사를 만들어 어음을 발행하는
등의 수법이다.
또 접대비나 회식비 등을 과다계상하거나 가공하는 수법으로 딴 주머니를
찬다.
법원이 예금통장이나 회사금고 잔고와 보고서를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전문가들은 법원의 관리감독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은 "판사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조직.인력시스템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3-4명의 판사로는 재산보전처분 회사정리개시 화의개시 정리계획안인가
화의계획안인가 등 주요결정을 내리는데 힘이 부친다.
그런데도 시스템은 서너명 판사의 어깨에 수십개의 기업의 "미래"를 맡겨
놓고 있다.
"현 인력시스템에선 철저한 관리감독이 불가능하며 대형 사업프로젝트에
대한 판단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한일은행 이성재 여신관리부장)이란
지적은 개선 방향을 시사한다.
재판부의 실무부담을 줄여주고 전문적.체계적으로 기업을 관리할 수 있는
실무그룹을 확보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것이다.
미국은 공인회계사나 변호사 등 전문가로 구성된 법무부 산하의 U.S.Trustee
가 기업자산의 분석과 판매처분권 채권자모임의 주선및 정리계획안의 작성
업무까지 맡아 한다.
법원의 업무부담을 덜어주면서도 효과적으로 법정관리업무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회사정리나 화의,파산등을 전담하는 "파산법원"이 따로 있다.
대한상의 엄기웅이사는 "법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서둘러 회사
관리위원회(가칭)를 법원 산하에 설치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정부의 법정관리제도 개선방안에도 포함돼 있어 설치여부가 벌써부터
주목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23일자).